<곡성>과 <아가씨>

가정의 달 5월부터 지난달까지 한국 극장가 이슈를 선점하며 흥행을 선도한 건 <곡성>과 <아가씨>입니다. 언제부턴가 화목한 ‘가정’ 그리고 따뜻한 ‘봄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 이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역린>과 <끝까지 간다>가 그랬고, 재작년 <악의 연대기>, <극비수사>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들 간에 흥미로운 경향성이 보입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불안한, 혹은 위험한 아버지상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해야 할 역할을 감당치 못하고 궁지에 몰린 현대 남성의 위기를 반영한 거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올해 주목받은 <곡성>과 <아가씨>는 어떨까요?

현대 남성 또는 아버지 위기 담은 알레고리
여기에도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위험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곡성>의 종구는 딸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나 열심히 뛰어다닐수록 해결은커녕 도리어 그만큼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아가씨>에서는 부재한 아버지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이모부가 오히려 딸 같은 처조카를 착취합니다. 비이성적 폭력성 속에 잠재된 히스테리적 부성이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그 희생양으로서의 ‘딸’이 묘사됩니다. 2, 3년 전에 관심을 받은 <도희야>나 <한공주>에서 볼 수 있듯이 딸이 희생자로 그려지는 건 한국영화 속에서 이제 일종의 클리셰입니다. 과거 1000만을 넘긴 흥행작 <괴물>에서도 결국 희생당하는 건 딸이었습니다. <곡성>에서의 종구 딸 효진은 어설픈 종구와는 달리 상당히 총명하고 어른스럽습니다. 그런데도 그 집안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가장 약한 지점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그 효진입니다. <아가씨>에서 ‘아가씨’에 대한 남성의 시선은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이모부의 도를 넘어선 성적 착취는 학대 그 자체죠. 즉, 두 작품은 딸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폭력을 위한 재물로 올려놓고 도피하려는 현대 남성 혹은 아버지의 위기를 담아낸 일종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지인에 대한 불안의식
이어서 <곡성>과 <아가씨>, 둘 모두 외부인, 즉 내부로 들어오려는 외지인에 대한 불안의식이 엿보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곡성> 플롯의 출발은 미스터리한 일본 남성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모든 사단의 원인으로 그를 지목합니다. <아가씨> 또한 내부에 들어와 가정사에 개입하려는 하녀는 분명 그 의도가 순수치 않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기보다는 외부에서 찾게 됩니다. 과거 나치 히틀러가 유태인을 희생양 삼아 내부결속을 도모했었지요. 마찬가지로 영국의 EU 탈퇴나, 미국 대선가도 속 트럼프 돌풍도 외부인에 대한 불안의식이 반영된 겁니다.
우리 안에도 사회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흔히 외국인 노동자를 걸고 넘어지지요. 교회 또한 교세 침체 원인을 사회 외부요인 탓으로 흔하게 돌리지 않습니까? 어느덧 자성적 성찰이나 이타적인 연민보다는 이기적인 공포가 사회 전반을 감싸고 있는 거지요.
한 마디로 이 사회는 ‘믿음이 결여된 사회’입니다. <곡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믿음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고, <아가씨>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곡성> 오프닝에 나오는 누가복음 24장 38절의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구절은 <아가씨>에 쓰여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믿음의 위기는 가족의 붕괴를, 신앙의 침체를, 공동체의 해체를 불러왔습니다.
가치의 내적 갈등과 신념체계의 불안 이데올로기가 플롯화·시각화된 <곡성>과 <아가씨>는 단순한 오락작품을 넘어선 사회적 맥락 가운데 이해될 수 있는 텍스트입니다. 영화는 늘 이렇게 사회를 반영해 왔고, 사회는 영화를 통해 그렇게 도상(iconography)화 되어 왔습니다.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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