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빠가 필요해
언제부턴지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렸을 적에 그래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제가 많은 가운데 우리 엄마 아버지는 내 몫이 아닌 n분의 1, 그것이 공평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살아온 것이다. 오히려 ‘나 하나’ 라도 조용히 있자는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다.
아이들 낳아 키우며 많은 일들 속에 세월의 한 뭉텅이가 지나갔다.
아마 그래서 중년의 경은 씨는 아이들이 떠난 ‘빈 둥지’에서 웬만한 건 다 들어주는 남편에게 ‘아빠’라 부르는 게 좋은 모양이다.
순하고 보드라움에 끌려
그 즈음 경은 씨는 가게 앞을 지나가다 문득 폭신한 봉제 인형 앞에 멈춰 섰다. 순하고 보드라운 모습을 한 하얀 토끼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이거 얼마예요?” “5만원이요.”
파스텔 톤의 연한 색 옷을 입은 토끼가 딱 친구 같았다. 종업원이 ‘손자’ 운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러기엔 젊어보였던 거 같다.
‘찾아보면 집에 아이들이 갖고 놀던 게 분명히 있을 텐데.’
정신이 들어 그 토끼를 내려놓고 돌아왔다. 토끼는 없어. 그런 토끼는 없었다. 대신 흔한 곰돌이 몇 중에서 단단한 심이 들어가지 않은 말랑한 작은 거 하나를 찾았다. 이런 저런 액세서리를 떼어내니 괜찮은 남자 곰이었다. 좀 미흡하지만 가까이 두고 보기로 했다. ‘사랑하면 정말 내 거가 된단다.’ 어릴 때 읽었던 그림 동화를 생각하며 바라보았다.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여자 곰을 선물해 주었다. 남자 곰 팔로 어깨를 두르니 다정함이 느껴져 왔다. 이만하면 됐다.
꿩 대신 닭
유아스럽고 예상치 못한 자신의 모습에 경은 씨는 ‘왜 그러는 걸까?’ 내심 질문하면서도 바라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며 위로가 되는 거 같았다.
어릴 때 형제 많고 오가는 객식구들이 많은 가운데 인형들을 맘대로 펴놓고 놀지 못해서였을까, 그즈음 읽은 톨스토이의 단편집에서 ‘사랑이 전부’라는 메시지를 받아 말랑한 감촉의 보드라운 인형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집을 떠난 자리, 빈 둥지가 허전해서 갖게 된 마음일까. 그토록 필요로 했던 자신만의 세계를 이제 갖기 시작하는 신호탄일까.
경은 씨 남편 ‘아빠’는 그 인형들 먼지를 털어주며 한 마디씩 한다.
“어떻게 세월을 거꾸로 살아?”
“가끔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가끔 하얀 토끼 인형도 사야 할까 생각해 보지만, 지금 경은 씨는 자신의 욕구를 찾아 곰돌이를 재활용한 기쁨이 한참 갈 거 같다.
객원기자 전영혜
전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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