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운동이 시작되던 4세기 초 수도원장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는 마귀가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여덟 가지 치명적인 악 혹은 더러운 생각을 일으키고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서도 첫째가 탐식(貪食)이었다. 오늘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탐식에 좀 더 취약할 수 있다. 신변잡기나 술, 담배, 사행적 오락을 삼가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즐기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탐식의 유형
첫째, 급하게 먹는 속식(速食)이다. 이 유형의 탐식자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태도이다. 빨리 먹기 때문에 그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수고한 농부들, 그리고 이것을 밥상에 오르도록 여러모로 애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할 겨를이 없다.
둘째,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이다.
셋째, 지나치게 많이 먹는 대식 혹은 과식이다. 배가 이미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 까다롭게 먹는 것, 미식이다. 이것은 종종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다섯째,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豪食)이다. 이는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세련되게 요리된 정찬, 우아한 식탁의 느낌, 아늑한 분위기 등의 여러 조건을 갖춘 식사를 바라고 고집한다.

먹는 것에 좌우된 삶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인생의 안위와 삶의 낙을 찾으려고 할 때 탐식은 그를 위한 훌륭한 방편이다.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탐식을 일곱 대죄(The Seven Deadly Sins)의 하나로 여겨온 이유도 이것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마음을 잠재우게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삶이 음식과 먹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지내게 되는 것, 그것을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탐식자는 음식에 의해 좌우되는 정도가 더 심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먹는 것에 시간, 돈, 마음을 쏟는 것이다. 탐식은 이 점에서 우상 숭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배만 섬기는’(로마서 16장 18절)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길들여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양식으로 영혼을 채우려는 것에는 신경이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소소한 부스러기에 막히는 영혼
상당수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영적 피폐함은 거창한 범죄나 정욕적 일탈과 같은 것에서 말미암기 보다는 이 세상의 식탁에서 집어 먹는 각종 부스러기들로부터 말미암는다. 성인용 음란 비디오물 보다 매일 접하는 잘 만들어진 월화, 주말 드라마와 같이 일상적인 것들이 더욱 사람들의 생각을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일상적 소소한 즐거움이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혼의 대동맥이 막히고 탁해지게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소소한 것들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스마트폰, 인터넷 검색, 영화, 드라마, 음식 등에 마음이 조금씩 쏠리면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약해질 수 있다.

가볍지 않은 결과
탐식은 다른 죄에 비해 가벼운 죄로 취급되기 쉽지만 가볍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6세기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은 “과한 희열, 볼꼴 사나운 희희낙락, 상스러운 말, 불결한 행동, 말을 많이 내뱉기, 그리고 사고기능의 둔화”라는 딸을 낳는다고 했다. 즉 식탐이 많아 배불리 먹어 포만감에 젖거나 술에 취하게 되면 말과 행동이 저속해져서, 말이 많아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하고 무례한 몸짓과 음란한 행동을 하며, 더러운 악을 주러주렁 열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성적 불순, 즉 정욕에 따른 행동은 종종 탐식이 낳는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죄로 취급되어 왔다.

영의 양식에 주리는 몸만들기
그리스도인이 탐식을 극복하려면 자기 몸의 생리를 우선 바꾸어야만 한다. 몸과 마음이 좀 더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성향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실제적인 훈련으로서는 ‘금식’만큼 좋은 것이 없다. 생활에서 때때로 음식을 끊고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신령한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금식이란 몸의 기운의 원천을 차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자기 몸을 채우려는 것이다.
이처럼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고 몸의 식성을 바꾸게 해주는 유용한 방편이다.

외로운 자를 나의 식탁에 초대하기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정들은 점점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폐쇄적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이웃을 집으로 초대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은 점점 보기 힘들고 또 기대하기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런 때 그리스도인들은 좀 달라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하는 이웃들과 그들의 외로운 식탁에도 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자기의 식탁에 초대하는 일에 좀 더 가치를 부여하고 노력해야 한다. 식탁은 먹거리를 나누는 공간이기에 어떤 면에서 생명을 나누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소박한 음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기쁘게 한다면 그것은 부지 중에 그리스도 혹은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신원하
보스톤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이사이며,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교수이다. 저서로는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문제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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