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

월트 디즈니의 전략은 상당히 치밀합니다. 껍데기는 분명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개 성인용입니다.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극장을 찾는 소비행태를 고려한 전략적 접근이지요. 아이는 아이 눈높이에서 시청각적인 재미를 즐기고, 어른은 성인의 식견을 가지고 작품속 더 큰 함의를 찾아냅니다.
<주토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동물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화적 공간을 통해, 다양한 민족과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현대 사회를 패러디하고 있어요. 게다가 장르는 거의 성인용이라 할 수 있는 ‘범죄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어둡고 섬뜩한 사건을 풀어나가지만, 누군가 죽어 나가는 이야기는 나오질 않아요. 즉, 성인용으로 내놓으면서도 동심은 아슬아슬하게 지켜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겁니다.

민주주의 시스템 패러디
약한 초식동물이며 여성으로 그려지는 ‘주디’가 그 신체적 한계와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주토피아에 경찰로 부임합니다. 강력계 치안 유지에 투입되고 싶어 하나 정작 부여된 임무는 주차단속입니다. 그런 ‘주디’가 연쇄 실종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사기꾼 이미지의 여우 ‘닉’과 함께 그 사건을 풀어나가게 됩니다.
영화 속 배경인 ‘주토피아’라는 도시는 거대한 지구의 축소판입니다. 전 세계 인종과 지역을 아우르듯 다양한 포유동물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육식동물이 육식과 야수성을 거세당한 채로 초식동물들과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사회인 거지요. 물론 그 사회의 패권은 여전히 육식동물과 거대동물이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체수가 많은 초식동물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권력자와 부유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민을 위한 공약과 사업에 매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패러디인 거지요.
그런데 독특한 것은 평등의 가치를 내세운 민주적인 사회임에도 대부분 거대 동물, 즉 강자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끼 같은 작은 동물에겐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운 구조예요. 마치 서구적으로 디자인된 서울이라는 공간에 한국인이 맞춰 살아가듯이, 작은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힘 있는 동물들의 규격 속에 적응시켜 나갑니다. 육식동물은 자신의 본능을 포기하고, 작은 초식동물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식으로 서로 양보하며 평화롭게 공존해요.

편견의 폭력성 비판

그렇지만, 편향된 시각은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육식동물은 육식동물대로의, 초식동물은 초식동물대로의 편견을 안고 살아가지요. 토끼는 약하고, 여우는 교활하다는 선입견이 만연해, ‘주디’와 ‘닉’은 작품 내내 그런 시선과 갈등을 겪습니다.
개인을 별도의 존재로 보지 않고, 특정 집단이나 유형으로 일반화해서 보는 고정관념은 분열적이고 파괴적입니다. 인종·국적·계급에 따라 우린 흔히 게으르다, 더럽다, 이기적이다, 탐욕스럽다 등의 낙인의 울타리를 치고 바라봅니다. 그 편견의 폭력성에 대해 영화는 신랄하게 비꼽니다.
영화 <주토피아>는 강자와 약자 구도에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선(善)의 위치를 부여해주지 않아요. 즉, 강하니까 승리한다거나, 약하니까 착하다거나 하는 등의 편향을 당당히 거부하면서 새 질서를 짜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다양성을 강조해요. 굳어진 결론에 매몰되지 않고, 과정을 인정해 나가자는 거지요.
그리고 영화는 공포를 경계합니다. 막연한 공포심이 주토피아를 파괴했던 것처럼, 공포 마케팅은 우리 삶을 묘하게 뒤틀리게 하지요. 공포는 정치·교육·건강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가장 효율적인 통제수단으로 활용됩니다. 심지어 종교에서도 종종 악용되지요. 그걸 통해 교회를 인생보험용 기복 종교의 공간으로 전락시키는 걸 흔히 봅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 크리스천을 종교 노예가 아닌 예수 제자로 만드는 출발점 아니겠습니까?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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