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돌본다는 것

동물 학대를 고발하거나 유기견 문제를 이야기하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은 이렇다.
“사람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동물까지?”
하지만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동물에 대한 학대와 약한 사람들에 대한 학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면 먼저 그 나라의 ‘동물권’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면 될 정도로 둘 사이는 긴밀하다. 힘이 약한 동물을 존중하는 사회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동물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1,200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이면에는 한 해 평균 약 10만 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지는 어두운 현실도 있다. 그뿐 아니라, 구제역 파동으로 600만 마리의 가축들을 산 채로 땅에 묻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또한 최근에는 도심 속 ‘길고양이 혐오증’이 길고양이를 돌보려고 하는 이들인 ‘캣맘’에 대한 험악한 위협으로 이어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동물에 대한 신학적 관점
이렇게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에 대해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태도는 ‘학대와 착취’가 대부분이다. 동물은 고통을 호소할 목소리도 없고, 사물처럼 다루어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지각’이 없는 물건으로서 그저 사람의 음식이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있다고 여겨졌다. 기독교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 때부터 동물들은 오로지 인간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쳐왔다.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18세기 말 공리주의 철학자였던 제레미 벤담은 최초로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있는 피조물이므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기독교에서는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동물들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동물을 형제와 자매로 여기기도 했다.
현대의 성서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 둘의 균형을 잡는 시각을 제안했다. “동물들이 소유한 권리에 대해 말하기보다 동물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우리의 책임”을 말한 것.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기 1장), 그분이 그들에게 생명과 식량과 서식지를 주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시편 104편),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들 고유의 ‘가치’를 말씀하셨기 때문에(마태복음 10:31; 12:12), 우리도 그들의 복지에 헌신해야 한다.”
더 나아가, 동물과 기독교 문제에 관해 광범위한 글을 써온 신학자 앤드류 린지는 ‘관대함의 윤리(Ethics of generosity)’를 말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가난하고 불이익 당하고 또 버림받은 자들에게 확장된 포용적인 도덕적 관대함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라 이 사고를 모델로 삼는다면 오늘날 모든 고통당하는 피조물들을 포함하여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관대함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청지기로서 약자 범위 확대하기
현대 신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탐욕을 줄이고 학대 행위를 제한하며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물과 상생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성서적 통찰이다. 그런 기준에 따르면, 지금 우리 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생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더 약한 피조물을 책임 있게 돌보는 청지기 인간으로서 동물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의 범위는 넓어지고 사회의 관대함 또한 깊어질 것이다.

◆ 참고도서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존 스토트 지음/정옥배 옮김, ivp.
<동물 신학의 탐구>, 앤드류 린지 지음/장윤재 옮김, 대장간.


박혜은 기자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