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첫 사랑’을 얘기하며 대학 생활을 꿈꾸게 한 선생님. 영은 씨는 그 영화를 보며 내용보다 노래에 빠져들었고 대학에 대한 환상을 마음대로 그리게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일탈을 미화해보면서.
현실, 땅을 밟는 것
대학 시험에 떨어진 2월, 발표보고 돌아오는 길 노오란 햇살 속 버스 안에서 나오던 트로트 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이별은 너무 슬퍼.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영은 씨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거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대학 생활에 겉멋이 들어 있었을 뿐 준비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은 거다. 아니, 미리 대학생처럼 멋 부리고 다니다 3학년 때 급하게 공부하려니 구멍 난 시간을 메울 길이 없었다. 이것은 영은 씨 자신만 아는 속사정이었기에 ‘시험은 속일 수 없구나’하며 헛헛해 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게까지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엄마는 앓아누웠고, 오빠들은 창피하다고 야단이었다. 죄인~ 이래저래 영은 씨는 죄인이었다. 나중에 들어간 대학은 원하던 데가 아니라 정붙이지 못했고, 가족 앞에도 늘 주눅 든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
황태자의 첫사랑, 하이델베르크
그로부터 20년 후(그래도 인생은 주님 품 안에서 잘 이어져) 두 아이들과 함께 독일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 꼭 가야 해.”
영은 씨는 ‘Drink, Drink’를 부르던 황태자와 친구들이 아직도 있을 것만 같은 학생 감옥, 그 배경이 되던 하이델베르크 성을 보고 싶었다. 그 때는 그 영화가 한국의 대학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리 가슴이 뛰었던가.
“엄마는 어릴 때 이런 멋진 대학생활을 꿈꾸었는데, 해야 할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학교를 떨어졌단다.”
“학교 떨어지는 게 뭐야?”
“으음, 시험 점수가 안 좋아서 그 학교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거야.”
“아, 우리 엄마 학교 떨어졌구나.”
아이가 재미있어했다.
슬프고도 아련한 옛 감정들이 올라오는 걸 느끼는데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2월, 졸업식을 가기도 멋쩍었던 때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나니 여고졸업식에 가는 것이 부담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등학교 졸업식을 안 갈 수도 없고.
엄마가 몸을 추스르고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나섰다.
‘아, 이렇게 어색한 때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사진도 찍고 꽃도 있는데 친구들과는 지나가는 인사만 하고 선생님 눈길은 좀 피해가면서 얼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초라한 날이었다.
고등학교 때 미리 맛본 대학생 같은 일탈들이 영은 씨에겐 평생 반성할 일로 남아있다. 성실하게 공부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그 낙방이 지금까지 삶에 교훈이 되기도 해 열심히 살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입시에 실패해도, 공부를 그리 잘하지 않아도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객원기자 전영혜
전영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