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

웬만한 대작이 아니고선 외화는 우리나라 극장가에서 맥을 못 추는데, 영화 <인턴>의 흥행은 놀라울 정도예요. 미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1/4이 한국에서 나온 겁니다.
이 정도면 압도적이죠.
도대체 대한민국 관객들에게 어떤 점에서 어필됐던 것일까요? 또 관객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들 극장을 찾은 것일까요? 물론 소재는 꽤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가벼운 코미디물은 상당히 흔하고, 게다가 이 영화의 만듦새가 그렇게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에요.
전화번호부 제작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내다 은퇴한 70세의 홀아비 벤이 주인공입니다. 은퇴한 그의 삶은 지루하고 허망할 뿐입니다. 그랬던 그가 인터넷 의류 쇼핑몰에 ‘시니어 인턴’으로 일하게 됩니다. 회사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 개선용으로 뽑은 거라서 뚜렷하게 하는 일이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벤은 마냥 들떠있어요. CEO이자 창업자인 젊은 애 엄마 줄스 옆에서 허드렛일을 돕는데, 줄스 입장에선 편한 관계는 아니죠. 그랬던 그 둘 관계에 점차 신뢰가 쌓이면서, 줄스는 가정 문제부터 사업적인 고민까지 여러 난관을 벤에게 의지하며 해결해 나갑니다.

실버 세대를 위한 판타지?
구관이 명관, Oldies but Goodies,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사회에서 ‘늙다’라는 것은 원숙과 해탈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노인들은 고립된 공간에 몰려 게토화, 즉 격리되었지요.
하지만 영화 속 벤에겐 ‘일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더 나아가 신세대 젊은이들과 ‘소통’까지 잘합니다. 우리 주변과 비교해봤을 때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은 ‘실버 세대를 위한 판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단순히 노년층을 겨냥한 작품일까요?
영화 속 벤이 현대 사회 노인들이 한 번쯤 꿈꿨던 ‘슈퍼맨’인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젊은이들이 바라는 노인상이기도 해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독선적인 가치관으로 화석화되면 폭력적으로 드러나기 쉬운데, 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내세우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먼저 배려하고 참으면서 그저 곁에서 묵묵히 지켜줍니다. 고집스러운 모습이 아닌, 바로 든든한 ‘어른’이에요. 그런 그에게 젊은이들 또한 편향된 인식을 깨고 먼저 다가가요.

세대를 뛰어넘는 소통 그리워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의 현명한 군주로의 자만, 리어왕의 연륜을 내세운 독선,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니코프가 보여준 논리적인 오만 등.
이런 휴브리스가 가득한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입니다.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나는 말한다. 너는 들어라!”
“당신의 말은 듣기 싫어. 정보에 빠른 내가 더 잘 알아요!”
소통은 없고 일방통행만 있는, 귀는 있되 그건 액세서리일 뿐이고 입만 있는 사회. 비판을 곧 부정(否定)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바로 우리 정치, 교육, 가정, 교회의 모습입니다.
대중영화는 사회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욕망을 반영합니다. ‘인턴’에 한국 대중이 반응을 보였다는 건, 영화 속 소통 방식이 그립고, 버팀목이 되어줄 어른이, 그리고 존중하는 젊은이가 그리웠다는 방증이지요. 영화 속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벤을 좋아한다.”
세대 간 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현 한국사회가 봤을 때, ‘인턴’은 ‘이 사회 전 세대를 위한 판타지’입니다.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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