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

우린 꽤 오랫동안 이성을 우위에 두고 감정을 소외시켜왔습니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곧 ‘비이성적’인 것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하지요. 특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명제 아래 발전해온 서양 전통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수많은 전쟁과 혁명을 통해 이성의 좌절을 경험한 인류사회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성의 결핍이 아닌, 독자적인 알고리즘으로서의 감정 개념이 주목받아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주목하는 건 ‘슬픔’
‘인사이드 아웃’은 그 감정이란 개념을 의인화해서 그려낸 애니메이션입니다. 영화는 부모를 따라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게 된 소녀 라일리의 마음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5가지 캐릭터가 라일리의 감정본부에서 그녀의 감정을 컨트롤합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본부에서 이탈되는 사건이 발생해요. 기쁨과 슬픔을 상실한 라일리는 시쳇말로 ‘중2병’ 환자처럼 행동하며 우울증에 빠져들지요.
일단 이 영화를 표면적으로 주도하는 건 ‘기쁨’입니다. 즐거움은 분명 인간의 적극적인 반응을 유도해요. 이른바 ‘생(生)에 대한 욕망’(eros)으로서, 인간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원천입니다. 이것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현대사회의 경제‧문화적 생산 흐름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가 결론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건 바로 ‘슬픔’입니다.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적극적인 요소인 ‘기쁨’에 비해 ‘슬픔’은 상대적으로 폄하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슬픔은 강한 관계성과 함께, 이타성이라는 공동체적 강점이 있습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연민’(pity)과 ‘공포’(fear)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가리킨 감정은 ‘슬픔’에 가까워요. 슬픔이 있기에 우린 공감할 수 있고, 위로할 수도, 위로받을 수도 있는 거지요.

간과했던 부분 다시 돌아보기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적극‧긍정적 사고방식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 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슬픔은 곧 패배로 연결시켰지요. 특히 1997년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광풍에 휩싸인 대한민국에선 “나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절박함에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범람하면서 적극‧긍정적 사고방식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홍보되었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일정 부분 그 시류에 몸담았던 것도 사실이지요. 게다가 요즘 대세는 ‘힐링’입니다. 그러면서 슬픔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소멸을 마치 치유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감정의 자유로운 활용과 소통, 이게 바로 진정한 치유인데도 말이지요.
다행히도 이제 서서히 이 사회가 과거의 그 오류를 바로잡아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잘 살겠다는 일념 하에서 간과했던 부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 거지요.
그런데, 희생자와 소외자의 고통을 쉽게 외면해버리려는 일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아쉬울 따름입니다.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자기 갈 길을 가는 모습이라 안쓰럽기까지 해요.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영어성경에 단 두 글자로 이뤄진 요한복음 11장 35절. “Jesus wept(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지만 정말 많은 걸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임택
대학에서 영화학과 미학을 강의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통해 영화를 독해하고, 시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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