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자 씨는 몸이 좀 약하다. 아마 어릴 때 큰 병을 앓았거나 사고를 겪었던 거 같다. 남들보다 단순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생활 반경이 좁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숙자 씨가 혼자 살며 교회에 출석하니 담당 구역장이나 주변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으로 그녀를 돌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엄마가 되어준 권사님
이 권사님이 숙자 씨를 맡게 되자 다들 안도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조용하고 책임감 있는 이 권사님이 숙자 씨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 고맙기도 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권사님은 정말 숙자 씨를 잘 대해 주었고 얼마 안가 ‘엄마’가 되어 주셨다. 일찍 부모를 여읜 숙자 씨가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자 내 딸은 지방에 살고 있으니 ‘서울 딸’로 하자며 받아 준 것이었다.
숙자 씨는 권사님의 팔짱도 끼고 기대기도 하면서 예배는 물론 교회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마치 엄마의 그림자처럼 옆을 따르는 아이의 모습으로 안정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수도 많아져 자신의 힘든 얘기, 사는 얘기를 다 하며 시장도 따라다닌다고 했다. 거의 집 안에만 있던 숙자 씨의 세계가 조금씩 바깥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이 권사님이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간간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이별에 적절한 시간
감사하게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가던 중, 권사님의 지병이 드러나게 되며 지방에 사는 자녀가 엄마를 모셔가게 되었다. 어쩌면 자연스런 변화였는데 모두들 숙자 씨 걱정으로 이런 저런 말이 오고갔다.
“권사님이야 딸 곁이니까 곧 적응하겠지만, 숙자 씨에겐 충격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정말 엄마를 떠나는 심정이 될지 모르는데.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지. 숙자 씨를 그만큼 보살필 사람이 또 있겠나?” 그러면서 숙자 씨에게 말을 건넸다. “권사님이 가셔서 서운하지?” 그러자 숙자 씨는 “엄마도 이젠 연세도 들고 몸이 안 좋아서 도움을 받아야 해요. 당뇨 때문에 혼자 주사 놓는 것도 보았어요”라며 생각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이 권사님과 함께 한 몇 년 사이 숙자 씨는 남을 생각할 수 있게 많이 성장한 것이었다. “나는 가끔 전화하면 되고요.”

한 사람 자리에 여러 명이 이듬해 비슷한 또래의 구역장이 숙자 씨를 맡았다.
이번엔 언니처럼 가르치며 인도하는 돌봄이었다.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따라다니던 아이가 이제는 언니와 거의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는 동생 모습으로 변해야 했다. 함께 하는 시간과 혼자 집에 가야 할 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 숙자 씨는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몇 명의 언니와 이모도 생겨 인사할 뿐만 아니라 농담도 하며 친교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십 수 년 전, 숙자 씨를 처음 보았을 때의 표정이랑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세월 속에 늙고 약해지는 게 보통인데 거꾸로 밝고 생기가 도는 얼굴이 된 것이다.

적절한 도움들
이제 와서 보니 그 때 숙자 씨는 엄마처럼 품어주는 애정이 필요했다. 그런 사랑을 이 권사님에게서 충분히 받으며 걸어 나갈 준비가 되었을 때, 언니 같은 구역장이 어느 정도의 경계선을 그어주며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게 한 것이다. 달리 보면 이 권사님의 빈자리를 아는 어른들이 알게 모르게 한 부분씩 맡아 잇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숙자 씨는 이젠 자기 얘기를 곧잘 하는 사람으로 무리 중에 끼어 있다.
“음식 쓰레기는 오빠가 와서 가져가요. 오빠는 택시 운전을 하니까 이 동네 오면 필요한 것도 사다 주고 우리 집에서 밥도 먹고 돈도 주고 가요.”
“저는 국수나 밀가루 음식은 안 먹어요. 소화가 안돼요.”
“교회에 너무 오래 있으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오는 게 좋아요.”
“요샌 성경 구절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 덕분에 숙자 씨의 신앙도 나날이 깊어지고 생활이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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