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영국인데 비가 안 오네.”
청명하고 상쾌한 8월이 지나자 으스스한 서늘함이 회색빛 하늘과 함께 밀려왔다. 온돌에 익숙한 우리에게 방 한쪽 라디에이터의 온기는(그것도 잠들 때와 깰 때 1시간만 작동하는) 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유학 생활 첫 학기에 아빠는 영어공부에 정신없고, 네 살 개구쟁이와 돌도 안 된 아기와 함께 길 모르고 말 안 통하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나. 게다가 비는 아무 때나 후드득 내리고 손바닥만 한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지나고 나면 휑한 바람이 뼛속으로 스며드는 전형적인 영국 날씨가 되었는데 말이다. 10월, 서머타임이 끝나고 시간이 당겨지니 오후 네 시만 되면 연한 잉크 빛이 돌며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달라지지? 영국 런던의 위도가 평양과 비슷해서 여름과 겨울의 밤낮 길이가 더 많이 차이 나는 것이었다.

영국 교인들과 사귀다
그 즈음, 큰 애가 집 근처의 영국인 교회 어린이집에 가게 되며, 우리도 영국교회 주일 오후 예배를 참석하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밀고 큰 애를 걸려 10분 쯤 가면 그들은 수선스럽지 않으나 친절하게 우리의 필요를 묻곤 했다. 어린 아이가 있어서 영어 배우러 다니지 못한다고 했더니 집으로 찾아와 주겠다는 선생님, 영국식 하이 티(가벼운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장로님을 보며 주님 안의 만남이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이나 갔을까. 구역에 소속이 되며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초대장을 받았다. 처음으로 외지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잡채를 만들어 한 접시 가지고 지도를 보며 찾아가니 집 안에는 벌써 커다란 칠면조와 옥수수 빵, 샐러드가 모여져 있었다. 대여섯 가정이 모인 파티는 노란 불빛아래 소박하고도 정겨웠다.
“a way in a manger no crib for a bed
the little lord jesus laid down his sweet head~”
그들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곡들은 대부분 미국식 찬송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이제 자연스런 식사시간인데 한국 잡채를 설명하라고 했다. 고구마 국수에 이런저런 재료를 넣고 참기름과 간장으로 양념을 했다니 냄새를 맡아가며 조금씩 가져갔다. 접시를 들고 편하게 얘기하며 식사하고 치우는 게 간편하고 좋았다.
한쪽에선 어른 아이가 한데 어울려 삼삼오오 게임을 펼치고 있었다. 스펠링 맞추기, 사목놀이, 링 던지기….

공정한(?) 성경퀴즈
파티의 하이라이트라며 다 모이라고 했다. 성경퀴즈는 예수님 탄생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애들 아빠는 답을 말하다 안 통하면 종이에 써서 보여주기도 하면서 결승에 올랐다.
사회자는 영국 대 한국의 대결이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알아듣기 쉽게 문제를 자상하게 발음하고 동시에 손을 들면 우리에게 우선권을 주는 배려, 결과는 6대 4로 상대방의 승리였다.
이어 가정마다 한 해 동안의 격려가 이어지며 호출되었다. 늘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대해주신 분, 아기를 낳아 기쁨을 주신 분, 파티 장소를 제공해 주신 가정, 병을 견디며 희망을 알려주신 분, 그리고 먼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주신 손님이라며 환영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 시상인데 “오늘의 일등은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4문제나 맞춘 한국팀”이라고 하는 거였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외국인에게는 맞춘 점수에 2배를 해야 공정한 거라는 설명이었다. 와아~
아이는 아빠가 이겼다며 좋아했지만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남을 배려해 본적이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 분들이 오늘 파티를 미리 이렇게 계획했나 생각도 해 보았지만 감동이 다를 건 없었다.
깜깜한 밤, 찬바람 속에서도 훈훈했던 그날의 기운이 평생 잊히지 않는 크리스마스 파티의 그림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전영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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