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가을, 기다리던 강좌 모임에 가서 진한 메시지와 함께 뜻있는 시간을 보냈다. 예상치 못한 옛 선생님과 대학 동창과의 만남, 얘기하다보니 알게 된 딸 친구의 부모 그 밖의 등등으로 마음이 들떴다. 강사의 지성적이고 영적인 깨우침이 소화할 틈도 없이 다가와 벅찬 과제로 안고 있는데, 우연한 자리서 오랜 세월 열심히 살아온 옛 사람들까지 만나니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고단한 날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누군가와 긴 통화라도 하며 정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얘기할 상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아,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시네.’

노년의 부모님과의 대화
노년의 부모님은 나들이 하는 일이 줄어들며 곧잘 전화를 기다리셨다. 잘 못 들으면서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대화하려는 엄마와 통화하려면 목청을 돋우어야 했다. 그것도 한 시간 이상 주변 얘기를 다 들으려 하니 바쁘거나 피곤할 때는 할 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에 생생한 활기가 없으면 기운이 없냐고 물으니 나 역시 건강상태가 좋을 때라야 통화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안부전화가 대단한 것 같아 형제들끼리 ‘보통 일 아니다’라고 중얼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책 얘기나 설교 내용을 얘기하면 토론이 되던 분이었다. 누구를 만났다고 하면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 기억해내 말할 맛 나게 했었다.
낙천적인 아버지는 내 삶의 스토리를 언제나 재미있게 들으셨다.
“그 일이 그렇게 풀리다니 하나님 은혜 참 감사하다”며 울먹이기도 하시고, “난 네 얘길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도 하셨다. 가족원들 중 가장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분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한테는 얘기할 때 과장법도 곧잘 쓴 것 같다. 그런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거저 교만하지 마라. 머리 흔들며 남 앞에 서지 말고…”라며 곧바로 ‘잡아당기는 역’을 했고.
노년의 부모에게 힘든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누가 말해준 건 아니지만 저절로 그렇게 바뀌어 가며 ‘기쁨을 드리는 전화’를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보니 부모는 내 기쁜 일들에 진심으로 동참이 되는 유일한 분들이었다. 아니, 나보다 더 기뻐하는 분들이었던 것이다. 마음껏 자랑하고 좀 과장해도 넘어가 주신….

진심으로 좋은 얘기 나눌 친구
힘든 중년기가 시작될 때 내적인 여러 얘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가 있었다. 영리하고 똑똑한 친구라 객관적인 말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워 할 때 그 친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보라고 하며 힘들어할 때마다 함께 해주었다.
그런데 이후 상황이 변하며 전화위복이 되는 것을 말하자 그 친구는 그전의 친밀감을 더 이상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려운 것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 재미있고 좋은 것을 마음으로 함께 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 때였다.
딸에게 전화가 왔다. 좋은 얘기를 실컷 말하던 할머니가 그립다고 했더니 “그래서 울었어?”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럼 너한테 얘기할까?”하며 한참 말하는데 반응이 조용했다. 다 교훈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뉘 집 딸인데~” 라며 웃어주는 건 내 부모만 할 수 있는 일뿐이었다. 하긴 나도 아이에게 유익될 것을 머리에 두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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