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은빛 노래 숲에 어린 새들이 정겹고 수양버들 사이로 아카시아 꽃잎이 영화처럼 내립니다. 그 아름길 따라가다 길을 잃고픈 푸른 5월, 밀양으로 가던 길은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올해 57세이신 김 집사님은 3년 전 당뇨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한계가 없다는 말처럼, 육신의 눈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게 더 많아졌다는 집사님…. 3개월 전부터는 급성 신부전증으로 이틀에 한 번씩 투석까지 하고 계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시작되지요. 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그래도 집사님은 서서히 하나님의 마음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고, 의지에 관성이 붙으면 더욱 강해지듯 그렇게 완강했던 육신의 저항을 내려놓고 나니 어둠속에 둥둥 떠다니던 ‘자살’이라는 단어가 ‘살자’로 바뀌는 건 한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마음
예전에 익히 알던 찬송가 노랫말도 이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새 노래로 바뀌었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던 감각들도 이젠 마음속에 새겨지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감정인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를 거둬 가신 하나님은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주셨다고, 그렇게 집사님은 감은 눈 속에서 새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시며 밝고 유쾌한 나날을 가꾸어가고 계셨습니다.
시력을 잃고 가장 힘든 게 뭐냐고 여쭈니 밥 먹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눈앞에 반찬이 놓여 있어도 한치 앞이 보이질 않으니…. 그래서 비빔밥으로 식사하는 날이 많다고 하십니다. 은총 속에 살면서도 은총을 모르고 산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집사님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은총 속에 살아왔는지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그날 집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집사님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 드렸더니 한 번에 한 번씩의 고맙다는 말과 몸짓에서 깊이 배어든 감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낮은 마음이랄까, 아니면 가난한 마음이랄까…. ‘복음은 가난을 배우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듯이, 소유가 나를 지배할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하늘의 마음이 말이 필요 없는 가르침으로 내게 와 닿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의 이야기와 노래도 자연스레 하모니를 이루었습니다. 하모니카를 연주하시는 한 집사님이 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오셨습니다.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애잔한 하모니카 소리가 곁들여진 노래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서서히 은혜의 방향이 김 집사님에게서 김 집사님의 아내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르르 흐르는 그녀의 눈물엔 수많은 사연이 상처로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집사님의 아픔, 그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고통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것이지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
남편도 모를, 아니 남편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고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홀로 감당해야 했을 아픔과 서러움들, 어제는 저런 일로, 오늘은 이런 일로, 내일은 또…. 하루하루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며 말로는 다 못할 고통, 아내로서, 엄마로서, 한 여자로서 그 짐들이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한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어떠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길어졌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을 사랑으로 번역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나눈 노래는 자복하듯, 참회하듯 부른 ‘사랑의 송가’였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이 곧 천도(天道)라고 한다지요? 남편을 위한 아내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위대한 사역으로 보였습니다.
고통으로 기쁨의 크기를 잰다는 말이 있듯, 그 기쁨을 충분히 누리실 날이 속히 오기를 마음으로 빌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시온성이 될 수 있는 것은 감사의 양에 달려 있다고, 상처는 영혼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물감이라고,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시련은 분명 하늘 문이 열리는 또 다른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기도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꾼다고 하지요. 김 집사님을 통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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