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특집 / 제주를 다시 들여다보기

바람 많고 돌 많은 거친 섬, 제주!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을 받았고 본토로부터도 천시를 받았던 ‘유배자의 섬’! 추사 김정희가 9년이나 이곳에 갇혀 ‘세한도’를 남기고, 박영효 대감이 고종 측근들 암살 혐의로 유배를 왔다가 뜻밖에도 제주의 첫 교회 건물을 마련한 곳이다.
섬이 갖는 특성으로 온갖 무속 신앙이 가득했던 제주가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쉼과 충전을 함께 할 여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선교 사적지를 돌아보며 중국 선교의 허브로 쓰이는 또 다른 제주의 한 면을 만나보자.

이기풍 선교기념관
평양 박치기와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기풍은 길에서 전도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피를 흘리게 한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 광경이 눈앞에 아른대어 괴로워하던 청년 이기풍은 며칠 뒤 마펫 선교사를 찾아간다. 겸연쩍은 대화 중에 용서와 감동을 받은 이기풍은 새 사람이 되고 이어 평양신학교에 입학, 1회 졸업생 7인 중 한 명이 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며 장로회 총회는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의하는데 바로 이기풍 목사였다. 한국교회 부흥의 첫 열매가 된 것이다.
이듬해 목포를 거쳐 홀로 제주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는 삼일간의 배 멀미로 탈진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하는데 그가 오면 죽이겠다는 무리들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좌절에 빠져 이 목사는 마펫 선교사에게 육지로 돌아가겠다고 편지를 썼다. 그 때 “당신이 돌로 친 내 턱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회신을 받고 회개하며 사역에 불을 지피자 바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기풍선교기념관은 제주시 조천읍에 1998년에 문을 열고 이기풍 목사를 비롯한 한국 기독교 초기 기록 사진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기풍 기록 영화도 상영한다.

성내교회ㆍ성안교회
1878년 생 제주 청년 김재원은 배의 통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좀처럼 차도가 없자 누군가가 경성 제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급히 배편을 구해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애비슨 선교사를 만난다. “예수를 믿겠다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에 그러마하고 늑막염 수술을 받은 뒤 완쾌되어 세례를 받는다.
김재원 청년은 제주로 돌아오는 길에 쪽 복음서를 가져와 친구와 예배를 드리다 애비슨 선교사에게 목회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평양 마펫 선교사에게 전해지고 평양 장대현교회가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선교 초기 좌절을 겪은 이기풍 목사는 김재원을 만나 1909년 세 명의 성도로 성내교회를 시작해 6개월이 지나며 주일 출석 20명을 총회에 보고하는 한편, 제주 공립 보통학교를 개교하게 된다. 이때 제주에 유배와 이 과정을 지켜본 철종의 사위 박영효 대감이 쌀 33가마에 해당하는 1백 원을 헌금해 예배당 건립에 초석을 마련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 유적지로 지정된 성내교회는 제주시 삼도2동에 위치하며 교회 마당에는 이기풍 목사 기념비와 함께 최초의 당회록 서문이 새겨진 돌비가 세워져있다.
그 후 성내교회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논쟁으로 기장, 예장으로 나눠지며 성안교회를 예장으로 분립해 내게 된다. 성내, 성안이란 이름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의 안쪽이란 뜻이다.

독립운동가 조봉호, 이승훈
숭실대생 조봉호와 젊은이 몇 명이 육지에서 복음을 접하고 제주 애월읍에 와서 예배를 드리다 자생적으로 교회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금성교회다. 조봉호의 영향으로 이도종은 숭실학교를 유학하고 제주 출신 1호 목사가 되어 대정교회를 목회하다 4ㆍ3사건 때 순교한다. 1911년에는 남강 이승훈이 제주로 유배를 와서 이들 교회를 통해 믿음을 가져 후에 민족의식, 신앙의식, 학교 교육을 역설하게 되며 이도종의 형제들을 정주 오산학교로 유학 보낸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조봉호는 이도종과 함께 4,500명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1만 원을 임시 정부에 송금한다. 이 일로 60여 명이 체포되자 조봉호는 자기가 독자적으로 한 일이라 하여 대구 형무소 복역 중 고문 후유증으로 38세에 순국한다. 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그의 기념탑 비문에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새겨져 있다.

하멜 표류 기착지
1653년(효종) 하멜은 네덜란드 무역선을 타고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하며 제주 모래사장에 표착하게 된다. 기독교인인 하멜과 선장은 배가 쪼개지기 전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했는데, 64명 중 36명이 제주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때 생포된 그들 앞에 모국어인 화란어로 말하는 벨테브레(박연)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벨테브레는 26년 전(인조 5년)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물을 얻기 위해 잠시 제주에 머물렀다 배를 놓치고 사로잡혔으나 전쟁에 공을 세워 조선여인과 결혼해 1남1녀까지 둔 사람이었다.
하멜 일행이 생포되자 벨테브레는 그들을 심문한 뒤 모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전쟁에 공을 세우면 자기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13년간을 일하던 하멜과 8명은 도망하여 본국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영어, 불어, 독어로 발간되어 처음으로 제주를 유럽에 알리고 ‘그 기간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신앙으로 살았다’고 고백한 하멜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하멜 표류기’가 나온 200년 후 칼 귀츨라프는 백령도를 거쳐 고대도에 입국해 한 달을 머물게 되는데 ‘무역기지와 선교기지로서의 제주의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토마스 선교사는 이런 기록을 읽고 조선 선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그 후 칼 귀츨라프의 말대로 제주에는 1973년 극동아세아 방송기지가 설립되어 전파를 통한 선교가 시작되었고 지금 제주는 자유특별구역이 되어 중국의 기독교 리더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 일은 여러 루트를 통해 단기와 중장기 단위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L 사모는 ‘중국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나라’라며 더 이상의 공개를 아꼈다.

4ㆍ3 사건과 이어진 교회의 역할
이기풍 목사의 순회 전도로 제주도 지역에는 여러 교회가 생겨났다. 그중에 모슬포교회의 조남수 목사는 4ㆍ3사건 당시 궁지에 몰린 주민들을 위해 문형순 경찰서장과 협의해 자수하는 사람을 무조건 살리기로 하여 수천 명을 구해내었다. 그 두 사람의 공덕비가 모슬포 진개동산에 세워져 있다.
또 대정교회의 이도정 목사는 심방을 다녀오다 공비들에 의해 생매장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이 목사는 시계를 선물로 주고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며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 하와이의 수탕수수 노동자로 건너간 장한준이 240원을 송금하여 법환교회 목조 예배당을 건립한 일도 감동적이다.
이기풍 선교기념관 마당에는 최근 한 사람의 순교기념비가 더 세워졌다. 바로 제주영락교회 출신의 배형규 목사의 기념비다. 2007년 아프간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피랍된 일행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된 그는 ‘선교지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예장통합총회는 2011년 그를 기념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무속 신앙이 가득했던 섬, 유배지로 천시 받던 곳, 4ㆍ3 사건의 불행한 역사로 이어져온 제주가 이제는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섬으로서,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명소로서, 그리고 선교의 요지로서 날마다 거듭나고 있다.

전영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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