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마을’의 조선인들 지키는 일본 도테교회 이야기

일본 가나가와 현의 북동부에 위치한 가와사키 시에는 ‘도테마을’이란 곳이 있다. 한때 재일동포 100여 가구가 거주했던 이 마을은 일본 정부로부터 ‘거주지’로 인정받지 못해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유령마을’이다. 지난 2007년 가와사키 시 당국은 이 도테마을에 홍수와 태풍을 예방하기 위한 거대한 제방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시 당국에서는 도테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 거주자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지만 아직도 세 가구가 남아 시 당국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도테마을에는 이 세 가구 외에도 일본인인 세키타 목사가 개척한 도테교회(손유구 목사)가 남아 있다. 도테교회는 얼마 남지 않은 주민들이 합당한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도테마을 주민들은 수요일이면 도테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 도테마을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 내 재일교포들의 고단한 삶과 지난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현장을 서울 효창교회(김종원 목사) 청년들이 다녀왔다.<편집자>

도테마을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유령마을이다. 재일동포 10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룬지 50년도 더 됐지만 가와사키 시는 단 한 번도 이곳을 사람이 사는 주거지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스스로 도테마을이 그려진 지도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나마도 돈이 없어 이제는 더 이상 지도를 만들지 않는다. 시 당국은 가와사키 중앙역에서부터 마을까지 들어오는 버스도 만들어주고, 전기와 식수도 공급하고 있지만 행정상으로 도테마을은 여전히 ‘유령마을’이다.
시 당국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많은 주민이 마을을 떠났다. 대다수의 주민이 떠나 황폐해진 마을에는 하지만 아직도 세 가구가 남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도테교회(손유구 목사) 역시 많은 보상금을 주겠다는 시의 제안을 거절하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는 모든 주민이 떠나고 도테마을의 기능이 다 할 때까지 주민들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밝혔다.
도테교회 덕에 마을을 떠난 주민들도 매주 수요일이면 교회를 찾는다. 20여 명이 교회에 모여 일본어로 된 성경책을 읽고 함께 식사를 나눈다. 도테교회의 손유구 목사는 교회가 마을 주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지 올해로 13년째라고 말했다.
도테교회에서 바라본 다마 강 건너편에는 잘 정돈된 일본식 가옥들과 고층맨션이 들어서있다. 현대식 고층맨션 덕분에 강 이편으로 늘어선 도테마을의 오래된 가설주택들은 한층 더 흉물스럽게 보인다. 가설주택은 말 그대로 임시 거처인데, 마을 주민들은 수십 년째 망가진 가설주택을 계속해서 수리하며 기울어진 집에 간신히 몸을 의지해왔다. 도테교회 역시 잦은 침수와 태풍으로 나무 기둥들이 뒤틀려 위태로워 보였다.

‘피사체’가 아니라 ‘사람’이다
손유구 목사는 자신이 거처하는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곳곳에 곰팡이가 폈고 벽지는 바랜 지 오래였다. 일본의 전통차인 오차가 예닐곱 잔 들어오자 방안은 금세 차향으로 가득했다. 창밖에서는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했다. 손 목사와의 대화는 무거웠다. 그는 허락 없이 교회와 교인들의 사진을 찍은 일로 화가 나 있었다. 우리는 한나절 머물다 떠나지만, 자신들의 삶은 이곳에서 계속된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들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재일동포 2세인 손 목사의 고향은 오사카였다. 간사이 지방 최대 도시인 오사카는 한때 일본의 신구문명을 대표하는 화려한 도시였다. 1945년을 전후로 나라가 없었던 조선인들은 오사카의 화려한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낯선 땅에서 하층민으로 분류된 이방인들의 역할은 저들의 화려한 문명이 지속 가능하도록 사회의 어둔 밑바닥을 채우는 일이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 1세대의 사회적 기능이 종결될 때 쯤, 자이니치 2세대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자이니치가 되었다. 이들에게 신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었다. 1963생인 손 목사는 인생의 대부분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본능 같은 것이었다.

흩어진 사람들의 삶은?
도테교회를 방문하던 날, 도쿄의 한 유명 대학 교수 일가족이 해외로 출국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교수는 일본 정부가 전 세계와 일본 국민을 속이고 있으며 일본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었다.
가와사키에서 원전 폭발이 있었던 후쿠시마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다. 살 수 없는 곳이라며 일본을 떠나는 대학 교수 일가족의 풍경과 그 일본에 머무르기 위해 시 당국과 싸움하는 조선인 노동자 후예들의 모습이 서글프게 겹쳐졌다.
도테교회에 들어서자 마을 주민들은 13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손 목사는 많은 사람과 단체, 언론이 도테교회를 훑고 갔다고 전했다. 하지만 무성한 논란과 말 속에서도 자신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피사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던 손 목사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머지않아 도테교회 역시 그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또 교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 또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슬픈 역사와 자이니치들의 굴절된 삶이 계속되던 그곳에는 오래지 않아 ‘슈퍼 제방’이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하지만 도테마을이 간직했던 그 삶의 기억과 도테교회가 주었던 소박한 위로를 ‘슈퍼 제방’은 과연 대신할 수 있을까?

재일동포들은 어떻게 도테마을에 거주하게 되었을까?
일본 가와사키 시는 예로부터 부촌이었다. 도쿄와 요코하마라는 대도시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가와사키 시에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군수공장이 대량으로 들어섰다. 시는 이 군수산업을 기반으로 차곡차곡 부를 축적했다. 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 1만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와사키 시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시가 지은 주거시설로는 유입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숫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지금의 도테 지역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마을을 일궜다. 그것이 오늘의 도테마을이 되었다.
도테마을에는 가와사키 시가 자랑하는 다마 강이 관통한다. 인류 문명이 그랬던 것처럼 갈 곳 없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강을 찾았던 것이다. 장마철이 되면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열악한 땅이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는 유일한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도테교회 손유구 목사 인터뷰

“그들이 있는 한 교회는 자리를 지킬 것이다”

도테교회는 재일동포들이 세운 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 그렇지 않다. 일본인인 세키타 목사가 1976년 개척했다. 세키타 목사는 일본이 한국에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목회 사명을 양국의 화해에 두었다. 세키타 목사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어떠한 차별도 거부했다. 교회에는 재일동포뿐 아니라 가난한 외국인, 일본인 노동자들도 모여들었다.

왜 도테마을을 지키나?
- 도테마을은 조선인들이 생존을 위해 머문 곳이다. 우리 마을은 일본 사회의 차별로부터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경계선과 방패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재일동포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숨기고 산다. 하지만 도테마을에서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한국 이름을 부르고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도테교회의 정신은 마을의 정신과 똑같다. 3년 전, 시는 교회에게 3억 원의 보상금을 제시하며 마을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교회가 그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면 깨끗한 건물에서 안락한 목회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절했다. 만약 교회가 먼저 마을을 떠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도테교회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주민이 합당한 보상금을 받고 떠날 때까지 마을을 지키기로 했다. 현재 세 가구가 남아있다. 그들은 불합리한 보상금 때문에 남아있기도 하고, 오랜 생활터전을 떠나기 싫어 남아있기도 한다. 그들이 떠나면 교회도 떠날 것이다. 그들이 남아있겠다면 교회도 남을 것이다. 도테마을의 주민들을 지키는 게 도테교회의 사명이다. 이는 모든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도테교회는 어떤 의미인가?
- 재일동포 2세는 1세대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다. 아버지 세대가 차별과 싸웠다면 우리 세대는 정체성과 싸운다. 아버지의 고향은 한국이고 모국어는 한국어지만, 나의 고향은 오사카이고 익숙한 언어는 일본어이다. 그런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한나절 이야기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았다. 모국이 싫어 선택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본인으로 살아야 했다. 세키타 목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도테교회로 온 것이 나에게는 큰 전환점이었다. 도테교회는 정체성과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던 나의 결론이다.

이규혁
효창교회 청년교육부위원장. 6월 초 일본 도테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 이 글을 아름다운동행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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