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① |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최근 기독교를 둘러싸고 불거진 일련의 논란들은 ‘올바른 신앙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사이비이단 교주의 개인적 욕망 때문에 제물이 되고, 한 공직 후보자의 ‘개인적 신앙에 기초한 발언’은 커다란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었다. 모든 개인적 신앙은 ‘올바른 신학’을 기초로 해야 한다. 올바른 신학적 기초 없이 ‘내 식대로 믿는 신앙’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럼 올바른 신학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아가는 길에 맨 먼저 우리 신앙의 공적 차원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백소영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의 글을 싣는다.

최근 기독교 교계 지도자들과 기독 정치인들의 ‘신앙고백적 언어들’이 세간에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 정서가 한껏 예민해져 있다 보니 그 반향이 더욱 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불미스러운 논쟁들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보며 어떤 이들은 이 시대 금기어에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월호 침몰도 ‘하나님의 뜻’, 일제 식민 경험과 동족상잔의 6・25 경험도 ‘하나님의 뜻’….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고 인간사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고백하는 신앙을 십분 받아들이더라도, 여전히 남는 안타까움이 크다. 운명사관과 섭리사관의 근본적 차이를 충분히 담아내어 전달하지 못한 것도 안타깝고, 하필 상처가 큰 이 때에 그런 말을 했나 하는 시의적 부적절성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공적(公的) 언어에 대한 인식 부족, 내 표현으로는 ‘끼리 언어’를 ‘사이 언어’로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끼리 언어’와 ‘사이 언어’
공동의 가치와 믿음체계를 가진 한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는 언어를 나는 ‘끼리 언어’라고 부른다. 우리 ‘끼리’ 하는 말들 말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기들 ‘끼리’만 하는 언어이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닭살’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 ‘끼리’ 주고받는 우리의 ‘끼리 언어’는 공적으로 말해질 때는 언제나 ‘사이 언어’로의 번역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이 언어’란 전제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선지식이 다른 너와 나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 가능한 언어’를 의미한다. 내용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같은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말들이 다 교회 안에서 했던 이야기이니 ‘끼리 언어’여도 되는 것 아닐까? 그리 반문한다면 나는 적어도 강연이나 설교는 ‘공적’이라고 답하고 싶다. 비록 ‘끼리’ 공동체에서 선포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쌍방이 평등한 권위를 가지고 대화 형식으로 나누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리더십을 가진 목회자나 전문가의 권위로 선포된 언어였다면 그것은 ‘공적’ 차원이어야 한다. 사적 대화가 아닌 이상 충분히, 그리고 명확하게 ‘사이 언어’로 번역 가능한 문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논란이 된 일련의 문제들은 모두 ‘끼리 언어’가 공적(公的)으로 선포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내용 면에서도 우리의 ‘모국어’인 성서의 핵심적 메시지조차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더구나 세상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 ‘사이 언어’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공적’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공적’
사실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구원사는 언제나 ‘공적’이었다. 행정관료제적 의미에서 ‘사무적’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공적’이라는 말을 나는 ‘우리 모두의 것(공공의 것)’이라고 풀어 쓰고 싶다. 어느 한 사람이나 특정 집단이 사유(私有)화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신(臣)’이란 단어가 당시의 사회적 언어였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굳이 무릎 꿇고 경외할 이가 있다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다’라고 자신들의 신앙을 사이 언어로 ‘번역’했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공공의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것’이었던 하나님이 어느덧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왜곡되어 율법주의에 갇히게 되었을 때, ‘천만의 말씀!’ 하며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선포 역시 ‘공적 신앙’이었다. 예수께서는 ‘백성’ 대신 ‘자녀’라는 새 언어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사회에 전달하려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방인이라고 배제되고 율법주의적 잣대 속에서 ‘죄인’이라 규정되어 배제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잃은 양 한 마리마저 기어이 ‘구원해야’ 완성되는 그런 나라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선포하셨던 그 핵심 메시지를 놓치고, 더구나 ‘사이 언어’로의 변환도 고려치 않은 채, 강단에서 선포된 우리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끼리 언어’는 실은 희생자들을 배제시킨 폭력적인 언어일 수 있다.
하니, 주의하고 또 주의할 일이다. 기도하고 또 기도할 일이다. 행여 우리의 유한한 언어가 ‘그 모든 생명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제한하여 누군가를 구원사에서 배제시키는 ‘망령된 일컬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공적’이시니 우리의 신앙고백도 ‘공적’이어야 한다.

백소영
현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기독교와 세계’, ‘현대문화와 기독교’ 등의 교양강의를 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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