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국민 모두가 긍지를 가지고 지켜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버큰헤드 호(號)를 기억하라! Remember Birkenhead!”는 말을 나누는 것입니다.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났을 때,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이나 승객들이 침착하게 속삭이는 말입니다.
지키기 어려운 전통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습니다. 일찍이 인류가 만든 많은 전통 가운데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그리고 아름다운 전통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으로 갖추어야 하는 인격과 사랑과 책무에 대한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18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해군의 수송선 ‘버큰헤드호’가 승조원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으로, 130명이 부녀자였습니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Km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시간은 새벽 2시.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는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또 한 차례 파도가 밀려와 배가 다시 한 번 세게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침몰되어가고,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선미(船尾)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들 모두의 생명은 이제 문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는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선상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되는 장교들도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젊은 사관들이었습니다. 구명정은 모두 3척, 1척당 정원이 60명으로 180명 밖에 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해역은 사나운 상어가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반 토막이 난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더 심해갔습니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승객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이제 극도에 달해 있었습니다.
함장의 지시대로
함장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병사들은 함장의 지시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도 없는 훈련처럼 민첩하게 행동하여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습니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사열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구명정에 옮겨 타고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마침내 ‘버큰헤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머리도 모두 물속으로 잠겨 들었습니다. 그 날 오후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4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함장 세튼 대령도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목숨을 건진 사람 중의 하나인 91연대 소속의 존 우라이트 대위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모든 장병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을, 상상하는 바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버큰헤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습니다.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사건 이후부터였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세월호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부끄러운 세월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나누면서 이기주의와 물신주의를 성찰하고, 돌이켜서, 더 이상 이런 부끄러움과 슬픔이 반복되지 않아야 이번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 아닐까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품격있는 죽음, 사람을 살리는 결단, 불법을 눈감아주는 썩은 관행에서 단번에 벗어나는 결단과 임무에 대한 정직성과 소명의식, 이것이 회복되어야 세월호의 참사가 헛되지 않고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겠지요!
이박행
18년 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두레공동체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다가, 전남 보성 천봉산 자락에 들어가 점점 늘어가는 암환우들을 돌보는 전인치유센터를 아름답게 세워 운영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환경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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