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에게 꼭 권하고 싶은 ‘어떤 결단’ - 제주 올레길 걷기

“도저히 시간을 낼 엄두가 안날 때, 건강에 적신호가 느껴질 때, 접어두고 떠나는 용기가 필요해.”
누군가 제게 준 충고가 생각났습니다.
정기 건강검진에서 여러 가지 수치가 정상치와 위험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상증상이 감지되고서야, 강제로 ‘멈춤’을 시도했습니다. 병원에서 경고하기 전에 이런저런 자각증상이 느껴지면 쉬어가야 할텐데, 꼭 검진결과가 위험군으로 나와야만 멈추는 도시인들.
어쨌든, 그래서 3박4일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기왕 멈출 바에는, 그동안 하지 못하던 짓을 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자동차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습관에서 며칠만이라도 벗어나 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걷기’를 시도한 거지요.

‘걷기 열풍’의 원조 ‘올레’를 걷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렇지요. ‘열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열심히 걷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100세 시대를 열고 있고, 기왕 100세를 살게 된다면 무병장수로 살아야겠다는 현대인의 욕구가 의학적 질문을 하게 했고, 예방의학은 기꺼이 정신건강과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내놓았습니다. 제주 올레와 100세 시대가 쌍둥이처럼 대한민국 전역에 ‘아름다운 길내기’에 기여한 셈입니다.
강제 쉼을 선택한 저도 자동차 없는 며칠을 살기로 작정했으니, 다른 곳에 가서 걷기보다는 아예 걷기열풍의 원조라 할만한 ‘제주 올레’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유능한 기자로 편집국 데스크로, 특종의 스트레스 속에 살던 시사지의 정치부 기자 서명숙씨가 만든 올레길 전설을 익히 듣고, 언젠가 한번 걸어보리라 맘먹고 있던 터였기에.
제주 방언 “꼬닥꼬닥 걸으라게!”를 음미하며, 시작했습니다.

단 10분도 걷기 어렵다
인터넷으로 제주 농가에 숙소를 정하고, 내려가 바로 걷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해변가로 나 있는 올레 4번 길을 무작정 들어섰습니다. 4월의 신선한 바람과 함께 시작한 걷기는 아주 행복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그 행복감은 시작 10분 정도에서 멈추었습니다.
겨우 10분 정도 지나면서, 쉬고 싶다는 유혹이 끊임없이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시간이 아까워 늘 조금만 거리감이 있어도 차를 타곤 하던 습관 때문에, 제 걷기 능력의 형편없는 퇴보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15분이 채 되기도 전에 길가의 작은 바위에 주저앉았습니다. 3분 쉬고 다시 10분 걷고…. 또 쉬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일을 멈추고 걷기 결단을 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지요!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아름답기 그지없는 제주바다를 유감없이 감상했습니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왕 나섰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다짐하고, 나의 마음을 다스리며 걷고 또 걸으며, 조금씩 적응하며, 시작하길 잘했다 느끼며, 감사가 마음에 채워짐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첫날부터 강행군이었지만, 꽤 괜찮은 결과였습니다.

“길 만든 사람을 만나고 싶다!”
표선에 있는 올레꾼들을 위한 안내소에 들렀습니다. 안내소를 지키는 자원봉사자에게서 인생 후반전을 사는 행복한 마음을 들으며, 올레길을 만든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안내소에서 제주 올레길의 정신과 실제가 빼곡하게 기록된 책을 사서 밤새 읽었습니다.
올레길 만든 서명숙 대표의 살아있는 이야기는 저의 가슴을 벅차게 했습니다. 제주 올레길을 만들며 사단법인체로 운영하는 것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동역하는 것이나, 후원자(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이나… ‘아름다운동행’을 만드는 우리네 이야기와 어쩌면 이렇게도 닮은 꼴일까, 공공의 유익을 위한 개척과 고난의 행군은 어느 분야에서 시작하건 이렇게 공감하고 동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구나, 눈물겹게 읽으며, 올레길을 만든 서 대표가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1천일 동안 제주의 길을 만들며 경험한 고백이 가슴을 적셔주었습니다.
“길이 막혔으면 뚫는다! 길이 끊겼으면 잇는다! 길이 없으면 만든다!”
이것이 서명숙 대표가 제주 올레 사역에서 가진 기준이랍니다.

“천당과 지옥사이를 매일 오갔습니다”
‘세상일에 무지한 퇴역기자의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영역 외의 것에 관심도 없고 쑥맥이기도 한 것이 전문가의 맹점이지요.
언론인 자리를 벗어던지고, 스페인 산티아고 여행을 결행한 것이 인생 하프타임을 놀랍게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행은 이렇게 자기 성찰과 함께 새로운 것을 향한 눈을 열어주는 ‘기회’를 줍니다. 눈이 열리고 생각이 트이니, 고향 땅 제주가 꽤 멋진 곳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됐고, 돌아와 시작한 것이 ‘제주 올레’입니다.
올레 길을 내면서 매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매일 했답니다. 그 가운데 제주도 전체를 ‘올레’(집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골목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통하게 했습니다. 26개 코스 약 400km로 구성된 올레길은 이제 완성되었습니다.
올레길과 함께 제주가 살아났습니다. 7년 전만 해도 제주관광이 침체기라고 했습니다. 2007년에 시작한 올레길과 함께 지금 제주는 호기를 맞고 있습니다. 제주만 살린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린 것입니다.

올레길 일본에도 수출했어요!
길을 만들면서 온 동네가 단장되었습니다. 걷는 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하게 마련이지요.
꼭 제주도까지 가서 걸을 필요도 없습니다. 서 대표는, 대구에도 양평에도 올레길 내는 데 기여했고, 일본 규슈에는 아예 4코스를 개장하는 아이디어 수출을 했습니다. 캐나다, 스위스, 영국에는 우정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올레길에 영향받은 수많은 길이 대한민국에 수없이 만들어졌고, 또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제주올레는 걸어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길입니다. 온전히 걷는 사람들만을 위한 길,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긴 길이 이 아름다운 땅, 제주에 꼭 알맞게 이어졌습니다.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돋아내어 제주올레가 되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이 띄엄띄엄 찍는 점의 여행이라면, 제주올레는 그 점들을 이어가는 긴 선의 여행을 만들었습니다. 점 찍듯 둘러보고 훌쩍 떠나는 여행에서 볼 수 없었던 제주의 속살을, 제주올레를 걸으며 발견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섬 제주를 걸어서 한 바퀴 돌 때까지, 제주 중산간의 숨은 비경과 작은 섬들의 저마다 다른 매력을 걸어서 느끼게 될 때까지, 제주올레 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걷는 맛, 치유의 기분
사흘을 계속 걷고 나니, 첫날 그토록 아프던 다리도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15분도 걷기 어려웠던 첫날의 느낌은 사라지고, 걷는 맛을 느끼며 고지혈과 여러 가지 위험증상들이 없어지는 듯 했습니다. 3주간 계속해야 습관이 만들어진다는데, 도시로 돌아온 지금, 그 습관 만들기에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창조주의 신비를 더욱 깊게 느끼고 감사하는 시간을, 우리 도시인들은 ‘결단’하고 맛보아야 할 ‘사역’입니다.
꼬닥꼬닥 걸으라게(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
이 말은 옛날 제주 할망들이 서둘러 달려오다 넘어지는 손주들에게 한 말이랍니다. 손주들 뿐이겠습니까. 빨리빨리, 대충대충하는 못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도 ‘꼬닥꼬닥’의 마음가짐이 중요하기에, 우리 인생에 이 말이 꼭 필요합니다.
* 여러분도 이런 삶의 ‘느낌’을 소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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