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 산천 경개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현제명 작사 작곡의 ‘희망의 나라로’의 1절 가사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이 노래를 한국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故이인범 교수의 목소리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의 맑고 올곧게 뻗어나가는 ‘희망의 나라로’ 목소리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를 기억하는 특별한 이유는 온전한 신앙의 힘으로 인생의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양북도 용천의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 교수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해 중학교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일본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유학 중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전일본음악콩쿠르 성악부에서 수석 입상을 합니다. 이듬해 도쿄에서 열린 기념독창회에서 ‘천부의 미성과 음악적 재질을 가진 당대의 독보적인 테너’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서울교향악단 성악부 단원이 되어 국민개창운동에 앞장섰고 한국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무렵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1953년 10월 어느 주일, 그의 아내가 셋집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다루다 화재가 났고, 황급히 곤로를 밖으로 들고 나오던 그는 얼굴과 목, 어깨 부분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그의 얼굴 한쪽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코와 입은 비뚤어져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무대에 설 수도 없게 됩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전성기 때의 준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거기에 주저 앉지 않고 3년이라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 신앙의 힘으로, 피를 토하는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표가 매진될 만큼 대중의 많은 관심 속에서 3년 만에 ‘이인범 재기 독창회’가 열렸습니다. 그 무대에 올라간 이인범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단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진 지 3년, 이 추한 모습을 하고 음악을 할 것인가, 아주 단념해 버리고 말 것인가,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탄식 속에서 방황하며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시간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으며, 불우한 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내 외양은 변하였으나 음성은 되찾았다는 데에 감사하며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이인범 교수는 화상을 당한 이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벽에 붙여놓고 살았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이러한 ‘범사의 감사’가 또 다른 이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가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영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아름다운동행 감사운동추진위원장으로 감사운동을 벌이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