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잘못되고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바벨탑을 쌓는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가 범한 아주 반신적인, 신에 저항하는 이야기의 효시가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바벨론이 출발한 BC 2000년경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벨론은 하나의 강대한 제국으로서 그 뒤에 엄청난 세력을 떨쳐서 이스라엘도 점령했습니다.
성경에 바벨 신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없지만, 바벨탑을 하나하나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탑을 쌓을 때 크고 작은 돌을 놓고, 돌과 돌 사이를 진흙으로 발라 연결하고 메웠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이야기를 보면 이미 BC 2000년 경에 구워낸 벽돌로 집을 짓고, 벽돌과 벽돌 사이를 역청으로 이었다고 되어있습니다.
당시에 90미터 정도 높이의 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건축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신도시는 문명의 꽃이고, 바벨탑은 이 문명의 꽃을 수놓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명예,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는 상징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벨탑 역사의 핵심
그런데, 하나님이 위에서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바벨탑은 우리를 배제하기 위한 탑이다. 창조주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들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것을 보시고 내려가서 이 바벨탑을 허물어야 되겠는데, 탑을 허물지 말고 다른 것을 허물자.ʼ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의 언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의 언어를 흐트러뜨리기로 결심합니다.
탑을 쌓다가 언어 이해가 달라지니, 바벨탑도 쌓다가 중간에 그만 두었습니다. 탑이 무너진 것보다도 언어가 무너졌습니다. 소통 구조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바벨탑 역사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엄청난 사건의 말씀입니다.
말은 하나인데 서로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일종의 ‘바벨탑 세상’이 됩니다. 4천 년 전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지금도 이런 현상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분노만 폭발할 뿐 해법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사고가 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도 같은 말을 썼는데 못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했고, 불신은 또 불통을 낳기 때문입니다. 불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속까지 믿을 수 있으면 서로 다 알아듣지만 못 믿고 의심하면 못 알아듣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불신은 불통을 낳습니다. 그 상징적 표현이 언어의 흐트러짐입니다.
언어만 흩어진 것입니까? 마음도, 사고방식도 다 흐트러졌습니다. 흩어진 세계가 오늘의 바벨탑 세계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 바로 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신뢰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역사를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시는 구원의 역사라고, 곧 구속사라 하며 그 이전 것은 일반 역사라고 하여 성격상 구분을 합니다.

안 통하면 죽음의 사회
그럼 성령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꾸시는 분이시고, 소통하게 만드시는 영입니다. 그 영이 바로 하나님의 영, 성령이십니다. 이제 바벨탑과 정반대 현상이 생겼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 이름하는 곳에 120명이 모였습니다. 120명은 전 세계 흩어져 사는 문명과 문화와 인종과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각자 전혀 다른 언어를 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와서 설교를 합니다. 히브리어로 설교했겠지요. 설교했더니 모두가 알아들었습니다. 모두가 다 알아듣고 감사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 한 언어를 듣듯이 다들 알아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모이면 통할 수 있습니다. 통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통하면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통하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통하면 나눌 수 있습니다. 안 통하면 죽음의 사회입니다.
한번은 수술을 받고 다시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수술 부위를 만지면서 아프냐고 아프다고 했더니 “아이고, 목사님 다행이네요. 안 아프면 이 부분은 죽은 상태입니다”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픈 것은 통하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안 통하면 감각이 없습니다. 안 아픕니다. 하지만 통하면 눈물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질곡이 많고 아픔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읍시다. 살아 움직이면 그만큼 우리에게 일감도 주어집니다. 서로 만나 봅시다. 껴안아 보고 때로는 싸워도 봅시다. 서로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말입니다.
OECD 국가들 가운데서 우리나라가 외국사람, 다문화 가족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문화만 제일 좋아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같은 언어와 문화 속에 살면서 서로 간에 제대로 통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서로 모여서 성령을 받으면 통할 수 있습니다. 통하면 새로움을 창조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그런 곳에 창조의 세계가 열립니다.

박종화 목사
한국 근대사와 함께 호흡했던 경동교회 담임목사.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이자 국민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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