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눈 속에 갇혀 있어요.”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했지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예상대로 학기를 마치고 보스턴에서 시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국 북동부 지역을 지나며 눈 속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주영 씨는 이지적이고 예의바른 중년 여성으로 공부 기간이 길어지는 남편 옆에서 자신의 공부를 계속 해오고 있었다. ‘사람 좋은’ 남편의 학위 과정이 이런저런 일로 오래 지속되는 중에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을 찾아서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남 챙기다 공부 늦어지는 남편 옆에서
서구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에게 “주말이나 저녁 시간 이후까지 도서실에 있는 너희를 보면 가족의 화평이 염려스럽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에 반해 주영 씨 남편은 “누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그걸 해결해주려 찾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서양식 의사소통 때문에 어려움을 겪거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늘 돕기 위해 나서는 의리의 학생이었다. 그러다보니 한인학생 대표, 총무 역을 도맡아 하게 되며 야유회와 각 모임을 주선하느라 동분서주 했다.
주영 씨는 이런 남편을 이모저모로 도우며 여러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예절바른 주영 씨가 속을 드러내 말하지 않아도 가까운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주영 씨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공부를 꾸준히 하는 건 그의 최선이었다.

세월 속 경험이 힘 될 꿈꾸며
그런 세월을 지나 얼마 전부터 남편이 일할 자리를 잡고 열심을 내게 되었다. 주영 씨는 자신의 공부 마지막 학기가 남아 기숙사에서 몇 달을 지내고, 데리러 온 남편을 맞게 된 것이다. 오랜 공부 끝에 일을 시작한 남편, 대학교에 입학해 집을 떠난 아들- 주영 씨는 결혼 전 자유로웠던 때처럼 학교에서 혼자 지내며 자신에게 집중했다.
삶과 하나님과 미래, 그리고 할 일. 지난 세월 속에서 한 겹씩 쌓인 경험과 공부가 합해 낼 새로운 희망의 그림을 그리며 고요한 시간을 지냈다. 가족들 걱정이나 홀로의 외로움보다 앞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슴이 벅찬 날들이었다. 다시 올 수 없는 귀한 기회를 감사하며 학기가 끝나자 남편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 짐을 쌉니다
몇 달 만에 데리러 온 남편의 거칠한 얼굴과 손길이 낯설게 느껴져 쭈뼛거리는 아내에게 남편은 말합니다.
“날 잘 몰랐던, 우리가 그 전에 만나던 때라고 생각해 봐. 우리 그렇게 여행하며 집에 가자.”
부부는 그렇게 낯선 사람인 채로, 결혼 후 처음 여행 갔던 곳인 그 폭포 앞에 섰습니다.
눈발 성성이 날리는 날선 바람 앞에서, 사랑에 빠져 앞뒤 없던 그 때나 했을 법한 다정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보고 웃어 주었습니다.
마법 같은 폭풍에 두 번이나 걸려들어 눈보라치는 길을 가르며 방을 구하느라 애쓰면서도 설레기만 하던 낯선 도시에서의 밤, 그리고 긴 이야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알게 된 이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만날 수밖에 없었던… 20년을 곁에서 살아왔는데도 또 새로운….”

낯설게 하기
친숙하고 일상적인 대상을 여행이나 거리두기를 통해 새롭게 느끼고 깨닫게 하는 예술적 기법이 생각났다.
늘 함께 있으며, 좋은 점은 당연하다 여기고 아쉬운 부분을 붙잡고 슬픈 우리에게 주영 씨의 ‘낯설게 하기’는 일석이조였다. 자신을 찾고 남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진….

전영혜
80년대 크리스챤신문과 기독공보의 기자로 한국교회 현장을 뛰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남편을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살며 아름다운동행에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글을 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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