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가 등장하다
지난 주 한 대학교 종강채플 특강 때의 일화다. 연애와 결혼 관련된 주제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청년들이 남녀를 서로 바라보는 바른 인식에 대해 준비를 했다. 채플 특성상 다수가 비크리스천일 것이라는 생각에, 성서 이야기보다는 친근한 문화콘텐츠로 접근하는 전략을 세웠다. 하여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이야기로 강의를 열었다. “여러분, 요즘에 ‘응답하라 1994’가 유행이지요? 여러분들도 보시나요?”
“안 봅니다!” 순간 당황했다. 너무나 큰 소리로 한 남학생이 번개처럼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최근 유행하는 핫이슈로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눈웃음이나 끄덕이는 몸짓으로 답들을 한다. 그 긍정을 받으면서 다음 이야기로 진행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 거다. 그 드라마를 안 본다는 학생이 그렇게나 큰 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하는 것은 내 예상에는 없는 일이었다. 이는 보통의 특강에서도 흔치 않은 광경이어서, 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표정들이 다양하게 분산되었다. 웃는 학생들에 난감한 표정, 그야말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당황 속에 진행된 강의
언제 어떤 대답으로 툭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학생을 계속 염두에 둔 채, 채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다수의 청중들을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여간 진땀나는 일이 아니다. 덕분에 나의 머리는 재빠르게 양분되었다. 한쪽은 강의 내용을 이끌어가기 바쁘고 다른 한쪽은 계속 그 남학생을 신경 쓰면서 견제하기 바쁘고…. 후자의 역할을 하고 있던 내 머리 한 구석에서는 계속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누가 데리고 나가겠지?’ 어쩌면 좋아. 아무도 그 학생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 듯 했다. 10여분쯤 지나자 슬슬 드는 생각은 이랬다. ‘아니, 이 정도면 저 학생을 데리고 나가야 하는 거 아냐?’ 그리 신경을 쓰느라 나름대로 기승전결, 내용을 갖췄던 내 강의는 마무리를 해야 할 텐데, 기승전, 전하며 ‘버퍼링’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주제가 되는 메시지를 후반 5분 정도에 강조하고자 했던 나의 의도는 날아가고, 급하게 마무리된 결론에 스스로 어색해하며 민망하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투덜거리는 마음이었다.
신앙심이 좋은 아이인데 뇌병변을 앓고 있는 장애우라고 했다. 하여 상식적인 반응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설명을 들으며 끄덕끄덕 예의를 차리고 나왔지만 사실 나는 내심 불만스러웠다. 그걸 알았다면 미리 조치를 취하거나 나에게 언질이라도 주었어야 했던 것 아닐까?

왜 불편했을까?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뭐든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나는, 여지없이 그날 저녁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그래, 어떻게 매번 성공적인 특강을 할 수 있겠어. 가끔 그럴 수도 있지. 이번엔 변수가 있었잖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마음에 나조차도 의아해서 자문을 해보았다. 그렇게 망쳤나? 늘 강의를 녹음하는 습관을 가진지라 녹음된 특강 내용을 다시 들어 보았다. 현장에서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는 음성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는 듯 했다. 결론 부분이 불충분하고 너무 성급했던 것을 빼면 그렇게 망친 특강은 아니라는 자체평가도 내렸다. 그런데도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리고 심지어 다음날 아침까지 내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그러다 학교로 출근하며 운전하는 길에, 불현듯 계시 같은 깨달음이 왔다. 아, 하나님께서는 그 남학생을 정말 사랑하고 계셨던 거구나! 그 아이가 거기 다른 학우들과 함께 채플에 참여하기를 원하셨구나! 내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셨구나! 그 아이는 거기 모인 그 어느 누구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진 예쁜 아이였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뻐 받으시고 계셨구나!
그런 아이를, 나는 계속해서 ‘얼른 내보내야 하는’ 존재로 바라본 거였다. 얼른 안 데리고 나가나? 도대체 왜 계속 두는 거지? 어머, 정말 삼십분을 그냥 두다니! 특강하는 내내 내 마음은 계속 이랬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 공동체 안에 두고 싶었던 생명을 내 멋대로, 내 잣대로 ‘내보내야 하는’ 존재로 분류해버린 거였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렇게 내내 불편했구나! 내가 특강을 마음에 쏙 들게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계셨던 거다! 그 아이도 내가 사랑하는 자녀다. 내 품에 품고 싶은 아이다. 거기 앉아 있을 권리와 자격을 가진 아이다! 얼른 회개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품으신 생명을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한 불신앙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순간 내내 불편하게 뛰던 내 심장이 평안함을 얻었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인데….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남보다 우월하고 높고 부자이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꾸짖으시며,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기준과 시선으로는 배제하고 멀리하려 했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려 오신 분! 그분을 믿고 따른다는 내가 그만 나의 선입견으로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포함시킨 소중한 한 영혼을 배제하려 하고 있었던 거다.
성탄의 계절,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을 기쁨으로 맞는다. 그렇게 늘 곁에 임하셔서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과 성급함을 일깨워 주옵소서.

백소영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이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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