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은 요즘처럼 옥수수가 나오는 시즌이 되면 초등학교 때의 한 기억이 뿌연 흙먼지 속에 그려진다. 자동차가 지나가거나 바람이 불 때 시야를 덮던 흙먼지 속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는 8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고, 그 중엔 고아원 애들도 꽤 있었다. 그 애들을 포함해 형편이 어려운 애들에게는 학교에서 매일 옥수수 빵을 나눠 주었다. 노란 알갱이가 보이는 옥수수 빵- 냄새도 좋고 먹음직한 옥수수 빵이 영실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빵바구니 사올 사람, “저요!”

새 학기가 되어 첫날, 선생님이 칠판에 몇 항목을 쓰셨다.

빗자루 5개, 쓰레받기 5개, 총채 5개, 걸레 20개, 빵바구니, 화분 5개.

사올 사람은 손을 드는 것이었다. 영실은 자신도 모르게 빵바구니에 손을 들었다. 왜 그랬을까. 빵바구니를 사오면 그 옥수수 빵을 하나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 그 즈음 영실의 집은 아버지 사업이 막 어려워지는 상황이었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영실은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일을 낸 것이었다.

영실은 결국 엄마한테 빵바구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엄마 얼굴을 보니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며칠이 지나며 선생님은 물건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사올래?”

마지막에 몰린 영실은 “엄마가 사주셨는데 깜빡 잊고 안 가져왔어요”라고 했다. 선생님은 “으이그”하며 머리에 아픈 군밤을 주었다.

 

내일이 또 걱정

그날 밤, 영실은 고민에 빠졌다. ‘집엔 돈이 없을 텐데… 어쩌지? 내일 학교에 가지 말까.’

이튿날,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와 영실은 계속 걸었다. 버스 종점 있는 데로 가니 흙먼지가 많이 날렸다. 차장 언니들 하는 일 구경하고 버스가 돌아나가는 걸 보고 또 보며 한나절이 지나갔다. 별 생각이 안 났다. 배가 고파 이제 집으로 가야 될 거 같았다.

아무도 몰랐다. 어딜 갔다 왔는지….

근데 내일이 또 걱정이다. 빵바구니!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학교는 가야겠고….

 

아직 남아있는 4학년 아이

영실은 무슨 일이라도 감당할 자신이 생겼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다음날 아침 영실은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엄마가 돈 없어서 못 사준대요.”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쪽지를 써 주었다.

‘영실 어머님, 영실이를 위하신다면 내일 학교에 오세요.’

사실 지난해까지 엄마는 생각도 못한 때 꽃 화분을 들고 학교에 나타나기도 했었고, 비 온다고 우산을 갖고 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엄마가 오는 것은 다르지 않나. 영실은 짐을 내려놓은 가벼운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이 뒤섞인 채 엄마한테 쪽지를 전했다.

별 말없이 학교를 다녀온 엄마는 표정 없는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건은 이렇게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학년이 마치기까지 가정과 학교에서 힘든 분위기가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은 젊은 엄마는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줄 여유가 없었고, 성숙하지 못한 선생님은 학년이 끝나기까지 영실을 편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 날, 영실은 제과점에 노랗게 구워진 옥수수 빵을 보고 너무 반가웠다. “정말 먹고 싶었는데…”

몇 개를 집어 들면서 아직도 마음속에 4학년 아이가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영실은 옥수수 빵이 먹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빵바구니를 사오겠다고 손을 들었고, 경제가 어려워지는 걸 피부로 느낀 아이는 엄마한테 사달라는 말을 못하고 고통을 혼자 겪다 거짓말을 하고 무단결석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죄책감과 함께 몇 개월을 소용돌이 속에 지내며 영실은 거짓말이나 즉흥적인 행동이 얼마나 어색한 삶을 만드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작은 천국 패밀리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세월을 지내며 작은 천국의 모습으로 성숙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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