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말한다.
“당신은 남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자기 합리화를 잘해. 항상 당신 자신이 진리야. 당신은 벽과 같아.”
누구보다 공정하고 너그럽고 바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말을 아내가 한다.
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고, 은혜도 많이 받았다고 믿고 있고, 성경 말씀에 대한 생생한 체험도 있으며, 남을 배려하는 편이고, 또 업무에도 충실하려 애쓰고, 비록 잔소리는 좀 하지만 아내에게 충성하며 살아와서 이만한 남편도 쉽지 않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왜 이런 말을 하지? 한창 젊을 때는 내 고집대로 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스스로를 계속 변화시키며 아내에게 맞추려고 여러모로 노력하며 살고 있는데 기껏 이런 말을 듣는 것인가? 아내가 보기에는 내가 아직도 멀었나?
삶의 혼돈이 올 때마다 스스로 자문해 보는 것이 있다.
“나에게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이 있음으로써 내가 무엇이 다른 게 있나?”
신앙 안에서 엄청나게 바뀌었다고, 예수님을 조금은 닮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집 팔아 바친 교인은 봤어도 성질 뽑아 바친 교인은 못 봤다”고 하더니 아직 내 속의 모습은 그대로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없으면 왠지 불안하다.”, “내 문제를 누군가에게 내놔야 하는데 하나님이 좋을 것 같아서 신앙생활을 한다.”, “사업상,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해서 교회에 나간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고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사람마다 신앙을 보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내면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신앙은 참으로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교회 일에 충성하고, 십일조 빠지지 않게 내고, 열심히 기도 생활하는 게 다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내면의 공허함이 메꿔지지 않는다. 음식을 많이 먹는데도 뭔가 모르게 채워지지 않고 속이 헛헛하다는 느낌,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뭔가 빠져있다는 마음이 들지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또 드러내놓고 속사정을 말하기도 쉽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떠나간다. 무슨 이유에선가 떠나간다. 가톨릭이나 불교보다도 개신교를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일까? 자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아서일까? 혹시 우리 또는 나 때문에 상처받거나 실망해서는 아닐까?
다시 신앙의 본질을 생각한다. 신앙이 무엇이기에 여기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갈까? 혹은 여기를 떠나기는 했는데 다른 곳으로 가지는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까? 떠도는 신자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저러다가 영영 떠나버리면 어쩌나. 아! 나중에 그 날 하나님께서 뭐라 하실까?

삶으로 구체화되는 신앙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일련의 신조를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믿음이지만, 믿음이란 게 내면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추상적이거나 허구화에 그칠 위험성이 다분하고, 또 실제로 믿음이 있는지를 알 수도 없다. 신앙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힘이 있는 것이다. 내면에서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 나와 삶으로 나타나야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과 화해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가서 화해와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상대의 손을 잡는 그 순간, 사랑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전기 통하듯 통하며 실체를 드러내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허상이 난무하고 그리스도의 삶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가냘픈 한 줄기 갈대와 같아서 누구나 넘어지고 너도 나도 자주 넘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넘어지고 나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잘못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기합리화를 꾀하기에 여념이 없다면, 깨 놓고 말해서 그것은 제대로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삶의 현장에서 바로 살고 싶다. 혼탁하고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싶다. 나에게 화살을 쏘며 해코지하는 사람에게 되쏘지 않고 그의 화살을 맞은 채 끝내리라. 부정한 물에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불의한 재물을 지혜롭게 거부하며 살리라. 아내와 자녀들에게 상처주지 않고 장모님을 성심껏 모시는 사람이 되리라. 그렇게 우직하고 바보스럽게 살기를 소망한다.

세상을 밝히는 소망
신앙이란 세상에 유익을 줄 때 빛이고 소금이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는 일부 젊은이들의 분위기도 있다는데, 혼자만 개별적으로 그렇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딧불이 같은 작은 빛을 여기저기서 비출 때 세상이 밝아지고 연약한 우리의 신앙은 점차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 사람씩 조그만 빛을 발하고 이웃에서 그 빛을 보고 자신감과 힘을 얻어 또 빛을 발하고, 이렇게 해서 세상을 밝히는 것, 나는 그것을 소망한다.

김정삼
법조인으로서 이웃의 아픔에 눈을 두는 그리스도인.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바름과 옳음을 생각하며, 윤리 환경 봉사 관련 NGO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원주제일감리교회 장로.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