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독자께서 제게 이야기 하나를 보내오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눌려 삶을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저의 어머니는 14살 어린 나이에 뉴욕의 차가운 쓰레기더미 속에서 저를 출산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뉴욕의 거리를 전전하며 무료급식과 쓰레기를 뒤지며 굶주림을 해소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길거리에서 키워졌습니다.
아무리 값싼 모텔은 물론, 노숙자 쉼터에서까지도 잠자리를 차지하는 날이 굉장히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이었고, 이름은 ‘노숙자’였습니다.
저는 공부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권이라도 책을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며 실력을 키워갔습니다.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온갖 시선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창생활 12년동안 자그마치 12곳의 학교를 옮겨 다녔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에 5권의 책을 읽었고, 뉴욕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신문을 정독했습니다. 거리의 길바닥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이었습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나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는 꿈. 우리 가족이 더 이상 남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꿈.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사람들은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깨끗하게 입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11학년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께 이사를 하더라도 더 이상 학교는 옮기지 않겠다고 부탁했습니다. 대학에 가려면 저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의 추천서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4.0에 가까운 학점을 유지했고, 토론 동아리에 참여하고 육상팀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모든 곳이 저에겐 배움의 장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복지단체들이 장학금으로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사회단체에서 저를 지켜봐 주었습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결국 저는 브라운과 컬럼비아, 암허스트 등, 미국 전역의 유수한 20여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남겼지요!
‘노숙자’였던 저는 지금 하버드대학의 4년 장학생입니다.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에 언제나 자신감을 가졌어요. 남들이 ‘노숙자니까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게 너무나도 싫었어요. ‘가난’은 결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카디자 윌리엄스라는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아무도 그를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번 아름다운동행에도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진하디 진한 삶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커버스토리 이상재 교수 이야기도 어쩌면 카디자 윌리엄스보다 못하지 않지요!
주변의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계절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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