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囊蟲蜂兒腐敗病’
낯설기 이를 데 없는 말이다. 하도 다양한 전염병이 시도때도 없이 몰려오니 올 봄에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 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낭충봉아부패병’은 꿀벌 유충에 생기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을 이르는 말이란다. 꿀벌이 폐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려 할 때마다 꿀벌의 죽음을 하나의 징조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생태계가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체감하지는 못하고 산다. 그러나 꿀벌의 죽음이 세계 식량 생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표정이 다소 진지해진다. 세계 100대 작물 가운데 71개가 벌과 나비의 수분활동에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꿀벌의 죽음이 인간의 생존에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봄의 초대장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새 소리가 들리지 않는 봄이 올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경고를 발한지 50년이 지났다. 고맙게도 우리는 지금 봄 신명에 지펴 하늘을 나는 새들의 비행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다. 꽃그늘에 숨어 꽃잎과 수작하는 새들을 보며 생명의 비의를 엿본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레이첼 카슨의 예고는 지나치게 성급했던 것일까?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피어날 때면, 잿빛 겨울을 나면서 어디에서 저 빛깔을 모았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매화나무에 꽃이 피고, 백목련 자목련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누구의 초대라도 받은 듯 싱숭생숭해 한다. 봄볕을 쬐러 밖으로 나온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와 풀꽃들에 눈길을 주다가 문득 시구를 떠올리며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좋은 일 아닌가? 시로부터의 소외가 현대인들의 비극 가운데 하나라는 데 이렇게라도 시구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고마운 일이다. 봄은 바야흐로 잃어버렸던 생명의 연대를 회복하라는 초대장이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불운한 천재였다. 관료사회에 적응하며 살기에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서슬 푸른 결기는 자기 시대와 불화하는 사람의 신음소리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봄은 무작정 행복한 시간이 아니다. 그는 봄 이후의 시간을 내다본다.

복사꽃 오얏꽃 부귀를 다투어 자랑하며
대나무 소나무를 쓸쓸하다 비웃네.
석 달이라 봄빛이 잠깐 사이 가버리면
소나무 대나무만 만 겹으로 푸르리라.

허균은 화려한 봄꽃이기보다는 만 겹으로 푸르른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봄꽃이 될 수 없는 자의 시샘으로 도외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눈은 조금 더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현상에 붙들리지 않는 시선, 그것이 그를 불우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유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다른 시 하나를 떠올린다.

떨어진 꽃잎 바람 따라 저마다 날아가서
하나는 주렴 위로, 또 하나는 웅덩이로,
영화와 욕됨을 그 누가 알리, 모두가 천분임을.
바람이 마음 써서 그리 된 것 아니라네.

<교산 허균 시선> 중에서, 허경진 엮음


꽃은 지게 마련이다. 땅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기도 하고, 웅덩이에 떨어져 물결 이는 대로 흔들리기도 하고, 주렴 위에 떨어져 제법 운치를 더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건 천분일 뿐이다. 임의로 부는 바람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서러워 할 것도 없고, 자랑스러워 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 혀를 차기도 하고, 뜻밖에 찾아온 행운에 기꺼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허균의 눈은 더 깊은 곳을 바라본다. 그 모든 게 낮에 꾸는 꿈과 같을 뿐이다. 본질의 세계를 붙잡지 못한 이들은 현상의 변화에 따라 일희일비한다. 잠시 봄 신명에 겨워 생명의 연대에 동참했던 이들도 꽃이 지고 나면 일상의 삶으로 재빠르게 돌아갈 것이다. 투덜거리고, 불뚝거리고, 한숨을 내쉬고, 탓하고, 그리고 아주 가끔 삶에 대해 고마워하기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 진부하다.

예수의 꽃을 피우는 잎
이 봄, 예수를 생각한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물 위를 걷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광야에 식탁을 차렸을 때, 그리고 종교인들의 위선을 가차없이 꾸짖었을 때, 소외되었던 이들은 환호했고, 제자들은 우쭐했고, 기득권자들은 눈을 치뜨기 시작했다. 사나운 바람 한 번 불면 밖에 핀 꽃은 다 지고, 안에 핀 꽃만 남게 됨을 누가 알았을까? 굳이 말하자면 신앙의 과정이란 우리 속에 예수의 꽃을 피우는 일일 것이다.
예수가 피로써 피웠던 그 꽃이 우리 속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봄신명에 지피듯 그분의 마음에 지펴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예수의 심정을 알아차리는 이들이 많지 않다. 예수는 살아 계실 때도 외로웠지만,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지천인 이 세상에서도 외롭다. 다들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분의 마음을 알아드리지는 않으니 말이다. 어느 시인은 다리를 재빠르게 통과하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 다리 위에 잠시 멈춰 풍경도 감상하고, 숨도 고르고 가면 좋으련만 모두가 너무 분주하다. 예수의 마음을 잊어 우리는 예수의 향기를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가 외로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뜬금없는 말이지만 예수가 꿀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마음에 하늘의 뜻을 수정시켜 주는. 그런데 그 꿀벌이 죽어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보다 높임을 받는 세상 아닌가. 봄 바람이 차갑다.

김기석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청파교회 담임목사인 그는 시, 문학,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진지한 글쓰기와 빼어난 문장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층들을 열어 보여준다. ‘길은 사람에게로 통한다’, ‘새로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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