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난 지 아흔 네 돌입니다. 1919년의 이 운동은 물론 기독교인들만의 운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큰 몫을 맡은 겨레 운동이었습니다. 그때의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겨레 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자, 기소된 자, 수감된 자의 기독교인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던 독립 만세 운동이었습니다.

다른 힘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신앙 지향성을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분이시다’라고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답게 이들은 어떤 다른 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거기에 저항하게도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미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우리의 선배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믿음 안에 들어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을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든 분이시고 영원히 다스리실 분이시기에 그에게만 ‘영광!’이라고 외치며 그분께 예배하고 또 찬양합니다. 그분만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가로막는 온갖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그 모든 것을 잘라냅니다. 그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값진 믿음입니다.

‘예배’만으론 완전치 않아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예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면 마땅히 그의 사랑을 우리의 사랑으로 삼아야 하며, 그의 정의를 우리의 정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무릎 꿇지 않습니다. 무릎 꿇게 하는 세력에 대하여 차라리 저항합니다. 그 세력은 다만 외세와 왜인의 지배 체제에 한정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바깥에서 오는 유혹과 회유와 강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방해물들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안에도(내 자신 속에도) 진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회유하여 어지럽히고 망쳐놓는 가지가지의 방해물들이 우리 안에도(내 안에도) 들어서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며 굴복하고는 곧장 받아들이고 마는 이른바 ‘관행’이니 ‘관습’이니 하고, 심지어는 ‘상례’이고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쉽게 무릎 꿇고 마는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명성이라는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들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배하는 자’는 이런 나부랭이 앞에 결단코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자라면 어떻게 그 따위 것들에 이끌리고, 무엇 때문에 그 따위 것들을 떠받들 수 있겠습니까?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에서 바로 이런 ‘예배 방해 세력’에 맞서 싸워갑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고야 맙니다. 이러한 삶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자가 ‘예수 사람’, 이른바 ‘그리스도인’ 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진정 삶을 예배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예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답게 예배를 훼방하는 세상과 싸우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예배는 예배이고 세상은 세상이라며 싸움을 피하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깨닫고 결단하는 계절이길 기대합니다.

박영신
사회학자. 평생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명예교수이다. 10여 년 동안 녹색연합 상임대표를 지냈고, 요즈음은 ‘탈핵운동’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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