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의 단골가게’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갔던 떡볶이 집은 일명 ‘콩나물 떡볶이 집’으로 불렸다. 어묵 국물 대신 콩나물국을 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 집 말고도 나에겐 단골 가게라 불릴 만한 곳이 몇 군데나 더 있었다. 한때 연탄 가게를 겸하여 했던 ‘알뜰슈퍼’가 그러했고, 딸 자랑이 끊이지 않던 금잔디 미용실이 그러했다. 새로 들어온 만화책의 1, 2권을 곧잘 서비스로 빌려주던 인심 좋은 ‘안델센 책 대여점’도 있었고 좁은 가게 이곳저곳에 다양한 학용품들이 잘도 쟁여져 있던 ‘금성 문방구’도 있었다.
사실 이 단골가게는 요즘 말하는 ‘친절 경영’과는 거리가 있었다. 패스트푸드점처럼 싹싹하고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지도 않았다. 들어오든 나가든 관심 없는 건 예사였고, 인기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는 거스름 돈 주는 것을 잊기도 했다. 물건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 미안해하기는커녕 되레 혼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친절하고 기분 나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면 어떤 물건을 사야할지 고민하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면 ‘그거 두 개 다 가져가라’며 파격적인 인심을 쓰는 아저씨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날 학용품이 필요하면 금성문방구를 갔고, 과자를 사기 위해 알뜰슈퍼를 갔다. 더구나 단골집 아들, 딸은 나와 같은 반 친구이기도 했고, 동네 언니 오빠이기도 했다. 내 이름을 알았고, 길거리에서 만나면 인사를 했다. ‘너 이번에 반장됐다며?’라며 ‘옜다, 선물이다’ 덤을 주기도 했다.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 ‘고객’일뿐
그러나 이러한 단골가게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대신 그 자리엔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똑같은 간판을 달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떡볶이를 팔고 물건을 팔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단골집이 그리워 멀리서 기차 타고 왔다는 말은 전설이 돼 버렸다. 그 떡볶이 맛이 그리우면 근처 체인점에서도 똑같은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손님에게 불친절한 경험을 인터넷에 올리고 그게 공분을 사게 되면 그 식당은 체인점 취소를 당하기도 한다. 손님이 들고 나갈 때마다 어찌나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싹싹하게 주문 받는지 황송한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친절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대형마트는 정말이지 수년 째 단골인데다가 팔아준 물건이 그리도 많건만, 내가 깜박 잊고 지갑을 안 갖고 왔다 해도, ‘다음에 올 때 갚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어제 내게 그토록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했던 소녀는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뿐더러, 난 그녀가 누구네 집 딸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고객님’이나 ‘손님’이지, 친근하게 이름 불리며 서로의 근황을 속속들이 아는 이웃은 아닌 것이다.
가끔 재래시장이나 동네에 있는 오래된 가게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친절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나도 대형마트가 편하고 익숙한 세대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친절’이라는 것, 그것은 그들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더 요구하게 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진짜 ‘친절하게’ 느껴지는 것
간혹, 단골이기에 또 이웃이기에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집 아들이 자폐가 있고, 남편은 몸져누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아줌마가 인상 찌푸리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줌마는 유일한 낙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느라 빨리 거스름돈을 안준다. 그럴 땐 오히려 그런 아줌마를 웃게 해주니, 조금이라도 드라마를 더 보라고 말없이 기다려 주는 인심(?)을 내가 쓰게 된다. 빨리 안 고르면 곧잘 엄한 표정을 짓던 문방구 아저씨가 웬일로 ‘천천히 골라’라고 말해준다. 그날 마침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게 정말 ‘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친절하다’라는 것은 활짝 웃으며 존대하고 구십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사실 그런 건 그리 자연스럽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웃지 않고 인사하지 않더라도 작은 배려가 더 살갑게 느껴지게 하는 것, 오랜 단골에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게 진짜 친절 아닌가 싶다.

배지영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오란씨’(민음사)와 장편소설 ‘링컨타운카 베이비’(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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