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남의 흠은 끝까지 잡고 늘어지는 반면 자기 잘못은 끝까지 부정한다. 안 들키면 그만이다. 명백한 자료가 나와도 잡아떼고 그것도 안 되면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오히려 큰소리친다.
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한 푼 손해 보지 않고 받아내려 하지만, 줘야 할 것은 주지 않으려고 이상한 논리를 갖다 대고 온갖 방책을 다 사용한다. 오토바이를 빌려 타다가 사고를 내서 오토바이를 부서뜨려놓고도, 오토바이 주인이 수리해 달라고 하면 오히려 왜 빌려줬느냐 안 빌려줬으면 사고도 안 났을 것 아니냐 한다.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을 해서 돈을 빌려간 후에 돈 갚으라 하면 괜히 돈을 빌려줘서 그 돈으로 사업을 했다가 실패해 손해를 봤다면서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이니 갚을 수 없다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부끄러움이 없다.
진실은 분명 하나인데, 진짜를 뒷받침하는 열 가지 근거를 갖다 대면 그걸 부인하는 열한 가지 반박논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가짜가 진짜인 양 사람들을 현혹한다.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같이 보이는 논리를 꿰맞추어 자기편을 많이 모으는 게 더 중요하다. 누가 암까마귀고 누가 수까마귀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다. 옛날 궤변주의자들, 소피스트가 그랬을까.

교언영색?!
조그만 건더기만 있으면 왕창 뜯어내려 한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우선 통 크게 불러 보고, 마음속 정의와 공평성의 잣대는 한참 틀어져 있다. 아무리 명백한 사실이라도 무조건 부인하고 본다. 증거를 들이대라며 양심에 털 나는 소리를 한다. 여차하면 고소부터 하고 그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판단자가 잘못됐다고 비난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편을 들지 않으면 적대시하고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틀렸다고 한다. 흑과 백(黑白)만 있고 회색이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 분노의 바람이 일상적으로 분다.

생각 없는 행동
아끼지를 않는다. 물이고 전기고, 지구가 어떻게 망가지든, 후손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않고 편한대로 쓴다. 물건 하나 사면 버려야 할 포장은 몇 겹이다.
상부상조, 근검절약의 아름다운 전통과 건실한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 전철 버스에서 앉아있는 사람이 선 사람의 물건 받아주던 모습이 아련하다. 선의가 잘 통하지 않는다. 나쁜 짓 하는 사람을 야단치다간 경치기 십상이다. 노인은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힘없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소위 스펙이니 비주얼이니 하면서, 형식이 인격, 진실, 내면보다 앞선다.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못 해주면 잘해줬던 때의 감사함은 다 잊고 못 해준 하나 때문에 얼굴 붉히며 달려든다. 이해타산 앞에 긴 세월 동안 가졌던 아름다운 관계니 정의(情誼)니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물론 세상 사람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탁류의 거대한 물결이 우리 사회를 빠른 속도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 우려스럽다.

그리스도인 냄새를 내자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일반의 평가는 교회 안이나 밖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교회 내부를 보자. 싸울 때의 방식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잡고, 뒤에서 욕하고, 없는 것 만들어내어 여론을 호도하고, 절제도 수치심도 없고 자존감도 없다.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적대감을 앞세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저쪽은 나쁜 놈이고 나만 옳다. 말은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속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은 성경에나 있는 이야기지 분쟁 속에 있는 나에겐 적용되는 게 아니다. 사회에서 통하는 상식조차도 없다. 하나님 앞에 선 자기에게는 너그러운데 비해 남에게는 엄격하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 끼리끼리만 어울린다. 세상에 끌려간다. 칭찬받을 만한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깨끗하게 산다하고, 자선을 하고 좋은 일 하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이 대다수이거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만 사회는 그걸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수가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교회 다니는 걸 때때로 부끄럽게 만드는 이들이 누군가? 대다수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싶어 안달복달하는데,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욕 먹이고 교인들을 좌절시키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 맑고 깨끗한 물줄기가 흘러야 한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고 문창모 장로(1907~2002, 전 세브란스병원 및 원주기독병원 원장)님으로부터 해방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자주 들었다. 당시에 물건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에게 물건 파는 걸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물건 값을 후하게 쳐 줄뿐 아니라 식사도 챙겨주는 등 너그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교인과의 계약에 있어서는 계약서가 필요 없었는데, 그것은 교인이 한 말은 천금과 같이 꼭 지켜졌기 때문이었단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쟁이라고 하면 믿고 신뢰했고, 그래서 해방 직후 전국의 시장 군수 또는 지도자들 중에 목사 장로 집사 등 그리스도인이 많았다는 것이다.

탁류에 떠밀려 갈 건가?
이 사회에 깨끗한 물결이 흐르도록 하는 것은 탁류가 빠르고 강하게 밀려오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다. 우리를 돌이켜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잘못하면 탁류에 휩쓸려 흘러가버린다. 자정능력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가 올지 모른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깨끗해야 한다. 너그러워야 한다. 친절해야 한다. 즐겨 손해도 볼 줄 알고, 즐겨 질 줄도 알고 덕스러워야 한다. 폭리를 탐하지 말고 부정한 것에서 손을 떼야 한다. 자연계와 물건을 아껴야 한다. 하나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직업에 불충실하지 않아야 하고, 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설교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좋은 소문이 많이 퍼져야 한다.
비록 그 동안은 잘못이 있었더라도 이젠 더 이상 탁류에 몸과 마음을 담그지 말아야 한다. 한 줄기 맑고 깨끗한 물이 우리 사회 곳곳에 흘러야 한다. 그래서 흙탕물이 점차 맑아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김정삼
변호사로 판사로 살아가는 ‘가진 자’이면서 이웃의 아픔에 눈을 두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교회와 사회와 국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있는 조직의 바름과 옳음에 대한 성찰과 주장으로 윤리 환경 봉사 관련 NGO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원주제일감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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