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더 까다롭게’
예전에 알고 지내던 구성작가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맡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 A에 대해 이야기 했다. A는 방송 중에 시를 낭송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덕분에 친구는 고심이 많았다. A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고 한다. A의 독서량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구성작가인 친구가 고심해서 어떤 시를 선정하면, A는 일단 작가가 누군지 묻고 이런 평을 했다.
“걔가 내 학교 후배잖아. 그때 쓰던 시 스타일 그대로라니까. 진부해.”
그러면서 퇴짜를 줬다.
참고로 A의 후배라는 그 시인은 국민 시인으로 불릴 만큼 ‘안티’가 거의 없는 이였다.
또 유독 한 작가의 글은 절대 인용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작가 역시 A가 잘 알고 있는 이였다. 그에 대해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유명세를 A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흠집 내고 깎아내리기
A는 자신이 모르는 작가의 작품이면, 굳이 맘에 들지 않아도 그런 대로 넘어갔지만, 자신이 아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선 유독 까다롭고 이해 못할 잣대를 대며 절대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A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다.
예수님조차 고향에선 인정받지 못했으니 그러한 행동이 A만의 별난 까다로움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과거에 알고 있던 누군가에 대해선 까다롭다. 그동안 이루어 놓은 노고를 인정하는데 너그럽지 못하다. 오히려 흠집 내고 깎아내리는 것이, 칭찬하고 평가해주는 것 보다 편하고 익숙하다.
더구나 그가 한때 자신보다 훨씬 못난 존재라 여겼던 이라면, 혹은 그저 알고 지내던 이라면, 그가 ‘현재’ 이루어 놓은 것들에 대해 치하해주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걔를 진짜 잘 알잖아’라고 운을 뗀 후 지금 이룬 무언가에 대해선, 운이 좋았거나, 술수가 있었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입을 삐죽대며 무시하고 싶어 한다.

더 객관적인 자세
한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작중 화자가 유능한 비평가로 보이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외국 작가와 작품에 대해선 칭찬하고 우리나라 작가나 작품에 대해선 무조건 깎아 내리며 날 선 비판을 하는 거요. 그러면 사람들은 ‘아, 이 사람은 뭘 아는 사람이군’하며 달리 본다니까.”
우리 안엔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서열이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순간에 만들어 놓은 견고한 틀로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서열이 깨졌다고 생각하면 몹시 난처해하고 그것을 깬 누군가를 기어이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학벌이나 출생지를 이유로 까닭 없이 비난하거나 끌어내리려 하는 이들의 심리도 그러하겠고 유명인들에게 근거 없는 악플을 다는 이들의 심리도 그러하지 않겠나 싶다.
성숙해진다는 건 이러한 서열을 만들지 않는데서 시작하는 것이겠지만, 행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하나 깨어나가도록 노력하는 데서 오는 거라 생각한다.
내가 과거에 알았던 사람이기에, 그가 (내 생각엔) 조금 부족하단 것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더 격려해주고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더 객관적인 자세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배지영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오란씨’(민음사)와 장편소설 ‘링컨타운카 베이비’(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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