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존에 대한 큰 사상 대부분이 전쟁이나 내전, 테러와 같은 폭력적 죽음을 경험하며 탄생한다는 것, 알고 계세요? 현대 세계에서는 홀로코스트가 한나 아렌트로 하여금 ‘인간의 조건’을 씨름하게 했고, 식민경험과 6.25가 함석헌으로 하여금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고민하게 했죠.
폴 틸리히의 ‘존재에의 용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군목사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한 전문 서적을 통해서만 신학적 질문을 했었다 합니다. 비존재, Non-being! 물리적 죽음을 포함하여 인간이 생명으로 자유로 존재하지 못하는 전쟁 상황에서 틸리히의 유한자로서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습니다. 나의 생명은 물론이고 불과 1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의 비존재(죽음)를 예측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연약한 인간은 얼마나 불안한 존재로 비춰졌을까요? 그러나 눈앞에서 전개되는 극도의 공포 가운데서도 우리의 선배 ‘인류’는 ‘존재할 이유’를 묻고 ‘존재할 용기’를 지닌 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고’ 살아남은 이야기들이기에, 그들의 사상은 크고 깊어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은 참 역설적입니다. 존재함(생명) 자체가 불확실하고 긴박하게 위협받는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사유하고 필사적으로 살고자 하는데… 상대적인 안정과 평화로움이 보장된 요즈음 우리는 ‘존재할 이유’를 묻는 일에도, ‘존재할 용기’를 가지는 일에도 게으르고 나태하니 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살의 소식이 많이 들리지만 우리에게 살아야할 당위를 힘 있게 전달하는 살아있는 사상은 드물어 보입니다.
편해서 그래! 살만하니까 생각들이 많아서 그래! 전쟁과 절대가난을 지나온 어른들은 그리 말씀하시기도 합니다만,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의 세상 역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 작동방식이 훨씬 교묘하고 일상화되고 개인화되어 버려서 이것이 세상과 구조의 문제임을 파악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을 뿐이지요. 너무 복잡해서 지레 포기하고 너무 보편화되고 일상화되어서 당연으로 받아들이고 너무 견고하고 힘이 있어 일찌감치 굴복한 현재의 존재방식! 지식인들조차도 나른해하며 넘긴 탓에 인간의 문명을 지어나가는데 사상적 토대가 되는 인문학이나 신학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자기반성을 해봅니다.


틸리히는 인간 실존을 ‘유한한 자유(finite freedom)’라고 불렀어요. 이러한 인간 이해에 기초해서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확장의 욕망을 실행하는 것. 제국주의나 물신주의를 비롯하여 작게는 한 집안에서 절대권을 누리려 타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가부장까지도 모두 이 첫 번째 범죄 즉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심각한 두 번째 범주의 죄는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우리가 공평하게, 동등하게 가지는 ‘자유함’을 포기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성서적 ‘자유’는 창조적 능력도 포함하는 개념어라고 생각해요. 내 삶을 이 땅에서 지어나갈 자유! 그 어느 누구의 조종이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건설해갈 자유! 그 자유함에는 내 삶을 창조해가는 능력까지 함께 부여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요. 바로 이 자유를 포기하고 죽음(자살)을 포함하여 이 땅에서 창조적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치는 삶(비존재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큰 죄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합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유한성과 창조적 자유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불안함도 공포도 결국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담대히 직면해야 하는 우리의 실존인 거죠. 우린 무한한 존재가 아닌데, 신이 아닌데 어찌 불안하지도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한 치의 오차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전문적인 실력자가 되고자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숨기고 떨쳐내려 애쓸 필요가 없지 싶습니다. 그건 모든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이나 포기가 정당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유한성과 함께 창조적 자유를 부여받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비존재의 상태로 몰아가는 그 어떤 물리적, 제도적 폭력 앞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를 만들어가고 상황을 다시 변화시켜갈 창조적 자유를 지닌 존재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존재에의 이유와 용기를 가지는 것 아닐까요?


새해 벽두부터 들리는 슬픈 ‘비존재’의 소식들에 가슴이 먹먹하여 ‘아름다운 동행’ 길목에 이리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해도 비존재의 가능성 앞에서 굴하지 않고 존재에의 용기로 버티고 이기고 넉넉히 넘겨내는 시간이 되기를….


백소영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이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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