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詩”. 어느 작가가 한 말이 한 사람을 만나고 제 가슴에 투명한 노래가 됩니다. 지난 여름날 억수같이 내린 비에 세상은 더욱 푸르러졌는데 여린 꽃들이 얼마나 많이 꺾여 있던지요. 세상이 ‘시이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쪽이 가라앉으면 한 쪽이 솟아오르고, 한 쪽이 솟아오르면 한 쪽이 가라앉고. 행복 반, 슬픔 반. 행복은 슬픔을 위한 것. 슬픔은 행복을 위한 것. 많이 베푼 사람은 많은 만족을 얻게 되고, 미지근한 사람은 어정쩡한 열매를 보게 되는. 세상은 시이소 같이 반반이 아닌가.

‘눈물 반 웃음 반’의 한 어머니
이번에 만난 분은 ‘눈물 반 웃음 반’의 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이놈의 눈물은 얼마나 흘려야 다 마를까요”라는 넋두리를 하셨죠. 신혼시절에는 찬송가만 펼치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교회 가기가 두렵기까지 했다고. 그렇게 눈물 많은 이 어머니와의 만남을 이야기로 쓰려하니 자판에 놓인 제 손가락 끝에 심장이 하나씩 달려 있는 기분입니다.
어머니는 밀양 산내면 마을에서 저만치 동떨어진 산자락 아래 작은 집에 살고 계십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날 동화 속 세상 같았습니다. 함박눈으로 인해 길도, 논도, 지붕들도 하얗게 덮인 속이었습니다. 이번 노랫길에 하얀 입김으로 동행해 주신 세 분의 벗님이 계십니다. 밀양 아름다운 공동체 회장님과 전도사님, 그리고 독일에서 오신 한스 할아버지입니다.
기찻길과 나란히 나있는 하얀 농로를 지나 도착한 어머니의 집. 어머니의 집은 경량 칸막이로 지어진 조립식 건물이어서 매우 추워 보였습니다. 마당에 강아지들조차 바들바들 떨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그러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달려 나오는 온기가 없었습니다. 바닥은 미지근하지도 않을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고 온열기에는 스위치가 켜지지 않은 걸로 보아 어려운 가정 형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거실 한 가운데 병원용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특유의 자세로 어머니가 누워 계셨습니다. 환자에게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햇살 같은 미소. 순간 ‘죽음의 경계선을 늘 가까이 하면 오히려 맑은 영혼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전 교통사고로 차 밑으로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얼굴이나 몸은 생체기 하나 없었는데 목(경추골절)이 부러지면서 신경이 끊어져 그 시로 지금까지 꼼짝없이 한자리에 누워 생활하는 신세가 되셨답니다.

눈물이 많은 어머니 영혼
언제나처럼 저는 하늘 평화가 우리의 영혼을 덮을 것과 주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시작으로 어머니를 위한 콘서트를 시작했습니다. 노래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눈물이 베개로 흘러 내렸습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는 푸른 숲이 들어 있고, 우리의 고통 속에는 숨은 꽃이 피고 있고, 우리의 영혼 속에는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눈물이 많은 어머니의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라는 말로 저는 어머니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어서 동요를 불렀습니다. 섬집아기, 오빠생각, 등대지기로 노래는 이어졌습니다.
동심이 천심이라고, 동심이 세상을 구한다고, 동심은 영혼의 고향이라고…. 어머니는 너무도 잘 아시는 듯 아이처럼 동요를 부르셨습니다. 어느 한 대목은 어머니의 솔로로 부르기도 하고 조용히 허밍으로 부르기도 하고 ‘노래는 영혼과 영혼을 참 가깝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요 부르기가 끝나고 한 그루 나무처럼 꼼짝없이 한 자리에 계신 어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하다 문득, 생각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 동화를 읽어주듯 들려드렸습니다. 다 기록할 수 없지만 다람쥐 이야기와 지렁이 이야기였습니다.

“눈치 안보고 맘껏 찬송하고파”
이야기를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주시던 어머니는 말 줄을 이어가시다가 제 가슴에 쿵하는 소리가 들릴 듯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지 26년 되었어요. 저한테 교회는 사치였죠. 벌어먹고 살아야 했어요. 애들이 2남2녀거든요. 돈 벌러 다니기에 늘 바빴죠. 놀 시간이 없었지요. 논으로 들로 남의 일도 하고 그렇게 뼈 빠지게 일만 했었어요. 그러다 어느 해 누구 소개로 재혼을 했어요. 남편은 하는 일 없이 늘 집에만 있었죠. 그리고 얼마 후 제가 교통사고를 당한 거예요. 위자료가 몇 억이 나왔어요. 재혼한 남편이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어요.”
아,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요! 어찌 이런 불행한 일이 겹칠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얘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맑은 이슬처럼 귓불 아래로 흘러 내렸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로 거듭나신 분 같았지요.
기구한 사연들을 너무도 쉽게 듣는 것 같아 저는 죄책감까지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에 와서 어머니를 위해 노래하는 게 위로가 아니라 누군가 어머니를 위해 찾아 와주는 것, 그게 위로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감히 여쭙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무엇인가요?” 어머니는 주저함 없이 “제 꿈은요, 예배당에 앉아서 눈치 안보고 마음껏 찬송을 부르는 거예요.” 어머니의 꿈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이어서 저는 한 구석에 들어가 벽을 치며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일상이 가장 큰 은총이리라. 하나님이 인간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제 영혼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저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타를 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함께한 벗님이 한 분씩 목소리를 섞으셨고 어머니도 눈물과 미소로 함께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도와주시니…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어머니의 얼굴은 환한 햇살 같았고 두 눈엔 빗줄기 같은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나누는 이야기 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 더 아름다운 이야기는 바로 어머니의 미소와 눈물이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어머니와 함께한 삶의 콘서트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詩)와 같은 삶을 산 한분을 만났습니다. 웃음 반 눈물 반.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새 노래로 사시는 한 어머니. 어머니를 만나게 된 건 제 인생에 엄청난 행운입니다.
어머니 집으로 가는 길의 설렘과 돌아가는 길의 즐거움. 그날 우리는 지상에 없을 듯한 기쁨을 안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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