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우리 겨레가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을 맞았습니다. 야만스런 일제 통치 아래서 민족정신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앙마저 짓밟혀야 했던 교회 앞에는 훼파된 기독교 정체성을 되살리고 민족국가 건설을 뒷받침해야 할 사명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본래의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였던 지난날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했습니다. 천황과 일본 제국 체제를 신성시하는 신사에 절하며, 민족을 등지고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협력했던 그 훼절(毁節)과 부역(附逆)의 죄책을 하나님 앞에, 겨레 앞에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고 사랑과 평화, 정의와 해방의 기독교 가치에 굳건히 터하려는 갱생과 쇄신의 몸부림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교회
그러나 해방을 맞은 교회, 특히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른바 교계 지도자들의 발걸음은 회개에는 느려도 너무 느렸고, 이해타산에는 빨라도 너무 빨랐습니다.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일제 말엽에 결성된 어용 조직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간판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꿔 달고 한국 교회의 주도권 장악에 나섰고, 어떤 이들은 교파 교회로 돌아가자면서 그 틈을 타 새로이 교권을 움켜쥐려고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과거의 훼절과 부역에 대한 반성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도리어 신사참배마저 옹호하고 나서는 지경이었습니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도피 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는 억지스런 주장이 등장하였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신사참배가 죄니 아니니, 죄를 범했느니 그렇지 않았느니, 참회를 해야 한다느니 또는 할 필요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오늘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닭 울기 전에 했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다”는 궤변도 나타났습니다. 이렇듯 회개를 거부한 채 교회 쇄신에 딴죽을 거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서글프게도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당시 교회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곳곳에서 교단 조직을 새로 조직하며 교권 지키기에 몰두하고, 군정청과 결탁하여 이권 챙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회개는 고사하고 교권과 이권에 정신이 팔려 또다시 기독교 신앙을 유린하였던 것입니다.

철저한 회개와 자숙 요구 움직임
그런데 그 와중에도 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거룩한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혔던 ‘수진(守眞) 성도’들이 출옥하면서 교회를 곧추세우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담임했던 산정현교회에 모인 평안도의 교역자들은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죄를 자복하였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징(勸懲)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痛悔淨化)한 뒤에 교역에 나아갈 것.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목사와 장로가 휴직 하였을 때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교회 재건 원칙도 발표하였습니다.
부산의 교역자들도 ‘통회자복 기도회’를 열고 “과거 10여 년간 전시라는 외형적 탄압과 황도주의(皇道主義) 일본정신 세력 아래 기독교의 일본정신화라는 내면적 박해로 말미암아 성경은 임의로 소멸되었으며, 신앙과 복음 진리는 여지없이 깨지고 무너졌으며, 교회는 국책 수행의 어용기관으로, 신성한 강단은 국민정신 선양의 무대로 화하여 주의 영광과 하나님의 말씀은 조선 땅위에 찾아볼 수 없었고 들어볼 수 없었다”라고 참혹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를 향한 배신과 반역의 죄를 통회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신사참배나 동방요배 같은 죄를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부흥이나 참다운 행복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하며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 투표를 시행하여 진퇴를 결정할 것”과 같은 강도 높은 자숙안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권을 움켜쥔 이들, 불과 얼마 전까지 신사에 참배하며 천황과 일본 제국 체제를 절대시하는 국가주의를 설파하고 일제의 전쟁 정책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의 방해와 모략으로 회개와 쇄신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여러 개별 교회에서, 교인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부산과 마산, 거창, 남해 등지의 교회와 교인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신도대회를 열어 교권주의자들의 부패와 비양심적 태도를 규탄하고 철저한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며 교회 쇄신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감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수진 성도’들의 정신,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회를 올곧게 세우고자 일어섰던 여러 교회와 교인들의 쇄신의 몸짓은, 비록 교권의 장벽에 부딪혀 한국교회를 오롯이 바꾸어 놓지는 못하였지만, 그 ‘작지만 큰’ 걸음걸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으며, 또 살아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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