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 안녕^^
오늘은 카톡(카카오톡)대신 편지로 조금 긴 인사를 나누려고요. 감사편지를 쓰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제 편지를 받아 마땅한 분은 바로 이름도 어여쁜 정.진.주. 바로 당신이랍니다.
기억의 끝을 따라 가보니 집사님과의 첫 만남은 당신의 둘째 딸 혜신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인가요. 생명의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집사님의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장난기 머금은 미소를 빼어 닮은 녀석은 수줍어 말은 없었지만 제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속 깊은 센스쟁이였죠.
대학에 갓 입학한 제가 주일학교 성가대를 맡아 헐레벌떡하고 있으면 옆에서 악보도 챙겨주고, 고 예쁜 입으로 노래도 곧잘 부르고, 말동무도 해 주는 일등 비서이자 수제자였습니다. 그런 혜신이가 벌써 한 남자의 아내가 될 나이가 되었으니 20년 세월 금방이죠?

그렇게 주일학교 어린이 성가대의 학부형으로 처음 알게 된 집사님은 성인부 성가대원을 하셨고, 몇 년 후 제가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하나요. 일 년 52주 한결같이 곱게 올린 머리와 단정한 매무새가 흐트러지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연습 시간에 항상 제일 먼저 도착해서 다른 사람의 악보까지 챙겨 놓는 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만드는 함박웃음과 쾌활한 목소리로 주변을 밝히는 분위기 메이커. 악보까지 복사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까 안쓰러워하시며 소리 없이 제 손발이 되어주셨던 분…. 저는 지금도 집사님이 챙겨주셨던 그 자판기 커피의 달달함을 잊지 못한답니다. 그때 처음 친구는 나이로 먹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집사님은 제 마음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교회 친구였으니까요.

엄마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비밀 연애의 고충에서부터 시시콜콜한 희노애락까지…. 집사님과 같이 있으면 알량한 자존심으로 꽁꽁 감추어 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들이 어찌 그리 술술 풀려나오는지요. “그래. 그렇지? 그럴거야…”, “힘들겠다”, “기특하다”, “예쁘다”라고만 해 주시는데도 저절로 나오는 마음의 이야기들….
그러고 보면 저는 집사님 덕분에 때늦은 사춘기로 인한 질풍노도의 이십대를 잘 지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구보다도 삶을 진실하고 겸허하게 살아오신 집사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겠죠.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직접 살아내는 것 같은, 시 같은 분이셨으니까요.
  
제가 결혼을 하면서 교회를 옮기게 되고 자연스럽게 조금 소원해진 시간들이 있었지만 집사님은 제게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던 2년 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맘 때 즈음. 청천벽력처럼 집사님의 병환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집사님은 몹쓸 병과도 친구가 돼 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나한테 왔겠어….” 할 것만 같은.
아니다 다를까, 서울대 병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집사님은 자기 몸보다 먼 길 온 사람을 걱정하고, 다른 사람 걱정할까봐 아픈 티도 내지 않으셨죠. 지금까지 그랬듯 묵묵하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겸허하게요.
이번엔 허리 통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지만, 언제나처럼 툴툴 털어버리시고 몇 년 후엔 함께 단풍 구경 떠나요. 여의도에서 사당동 정금마을까지 혜신이를 뒤에 태우고 신나게 자전거 폐달을 밟으며 다니셨던 20년 전보다, 더 아름답고 포근한 나의 20년 지기 친구님! 사랑해요 ^^     

하지숙(KBS 클래식 FM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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