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란 영화가 있다. 90년대 말에 나온 영화로 고소영과 임창정이 주연이었다. 그리 큰 흥행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봐도 참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초짜 야구심판과 당대 최고 여배우의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는 바로 ‘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꿈의 절대적 기준, ‘나’
영화 속 임창정이 고소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교통순경이었다. 무면허로 차를 몰고 있는 여대생에게 딱지를 끊는 대신 그는 운전 연수를 시켜주면서 친하게 지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한다. 
그는 야구 선수가 꿈이었다. 그러나 체격도 왜소하고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꿈’에 대한 상식(?)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꿈을 조정한다. ‘꿈이란 것은 바꾸면서 살아야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꿈이라는 것은 이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치 소풍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꿈을 바꿔야만 하는 사람이 대개 취하는 자세일 수 있는, 비관을 그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를 떠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야구 심판이 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심판이 되기 위해 부딪치는 여러 난관도 극복한다. 더구나 언감생심 꿈꾸지 못할,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 같은 일인, 당대 최고 스타인 여배우와도 사랑을 이루게 된다. 
꿈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마치 진리처럼 두 가지를 말한다. 큰 꿈을 꾸라는 것과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여기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이 제거된 상태에서 어떠한 꿈은 그저 허세일 수도 있고 미련한 시간낭비일수도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며 현명하게 꿈을 조정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그것은 꿈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룰 수 없다면 꿈을 바꿔 보는 것, 그것이 있기에 우리 인생은, 뜻하지 않은 아름다운 기회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큰 꿈’이라는 것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내가 꾸는 꿈
내가 학생부 보조 교사를 할 때다. 중등부에 여학생 A가 있었다. A는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얼굴도 예쁘고 옷도 참 잘 입었다. 손재주가 좋아 아빠와 남동생의 이발은 자신이 직접 해준다고 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A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용실에 취직하고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난 너무도 부끄럽고 경솔한 짓을 하고 말았다. 선생님이랍시고 나는 A에게, 일단 대학을 들어가는 큰(?) 꿈을 꾸라고 권했다. 난 고작 중학교 1학년인 A가 성적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A는 ‘꿈의 조정’ 과정을 거친 이후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한 시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등록금을 댈 형편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A는 대학에 가치를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설정한 A의 꿈은 결코 작은 꿈이 아니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해 기다리는 과정도 그녀에겐 아마 소풍을 기다리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러한 꿈을 멋대로 판단하고 이래라 저래라 했으니 얼마나 언짢았을까.   
꿈꾼다는 것. 그것은 절대 타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참 개인적인 일이다.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만이 꿈을 조정할 수 있다. 더 노력하면 될 텐데 왜 포기하는 걸까,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꿈의 크기에 대해서도 이래라 저래라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엔 미련해 보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권리가 또 ‘내가 꾸는 꿈’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 같은 기적적인 꿈의 성취도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배지영
200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오란씨>(민음사)와 장편소설<링컨타운카 베이비>(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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