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추억된 순간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향일 수도, 떠나보낸 연인일 수도, 또는 어쩔 수 없이 손에서 놓아 버려야 했던 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섬은 ‘그리움’이란 단어와 닮아있다.
육지를 향한, 사람을 향한 섬이 가지고 있는 ‘그리움’은 섬의 운명이다.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증도는 사람과 육지를, 그리고 문준경이라는 한 여인을 그리워하는 섬이다.
사방에서 ‘빠름’을 외치는 시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신의 속도로 숨 쉬는 섬 증도. 증도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건 슬로시티라는 별명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의 시계가 멈춘 듯한 그 고요함과 청정한 자연 외에도 증도가 가지고 있는 남다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면적 40.03제곱킬로미터의 약 2,200여명이 사는 작은 섬 증도는 섬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다. 이 작고 고요한 섬 증도가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특별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문준경이라는 한 여인이 있다. 평생 여인으로서 길을 찾아 헤매다 그 자신이 많은 이들의 길이 된 문준경. 그녀가 다닌 증도의 많은 길이 이제는 복음의 길이 된 셈이다.

결혼 첫 날 외면당한 새색시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넉넉한 양반 가문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문준경은 남달리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는 남자들처럼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 여자는 사회적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일 때라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그의 뜻을 듣고 불호령을 냈다.
소녀 문준경은 장성하여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정근택과 결혼한다. 그러나 정근택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결혼한 문준경은 신혼 첫날,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결혼 하자마자 생과부가 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남편은 몇 달씩 연락도 없었고 집에 오는 날은 일 년 중 손에 꼽았다. 이런 상황에도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문화가 강할 때라, 이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남편없는 시집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고됐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동서의 시집살이에도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시아버지다.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글을 가르쳐준 것도 바로 시아버지였다.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한 설움을 문준경은 글을 읽고 쓰면서 달랬다. 세월이 흘러 그녀에게 큰 사랑과 배움을 준 시아버지도 병으로 죽고, 남편은 아예 소실과 살림을 차려 나가고 이제 그녀의 인생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준경, 스스로 길이 되다
1927년 3월, 한 전도부인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문준경은 이듬해 6월 세례를 받는다. 이로써 그녀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신안의 여러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문준경은 자신의 성경 지식의 부족함을 느끼고 집사 신분만으로는 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다. 그녀의 고독이 복음을 향한 열정으로 바뀐 것이다.
문준경은 학기 중에는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방학이면 다시 증도로 내려와 사역했다. 방학이 끝나면 문준경의 빈자리를 마을 주민들이 메워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그녀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6?25사변이 터지고 공산당은 증동리까지 내려왔다. 당시 목포에서 피신 중이던 문준경은 그 사실을 알고도 증동리로 가고자 했다. 아들, 딸같은 증동리 성도들을 두고 자신만 목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말리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의연하게 증동리로 갔고, 결국 공산당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때 문준경과 함께 48명의 증동리교회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순교를 당했다.
증도는 문준경에게 아픔이자 상처의 섬이었다. 한 여자로서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당한 그녀는 어둡고 막막한 20여 년을 눈물로 보냈을 것이다. 그 어둠의 길 위에서 그녀는 진짜 ‘길’을 찾았고, 자신이 길이 되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 여인의 상처가 많은 이들을 복음의 여정으로 인도해낸 것이다. 증도의 성도들은 지금도 그녀를 그리워한다. 몸소 하늘의 사랑을 알려준 그녀를….
천국이 그리운 계절, 고독한 당신에게 증도를 추천한다.

 

사진 홍성사 제공 

글 박정은 기자 springday@iwithjesus.com

 

천국의 섬, 증도 / 홍성사 펴냄
문준경의 삶의 궤적을 따라 증도를 걷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책은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증도 구석 구석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부록으로 담긴 코너는 증도의 교통편과 섬 안의 11개 교회 주소 등 증도 여행시 요긴한 정도가 담겨있다. 증도로 순례여행을 떠나려는 이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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