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올라간 뒤 가장 무서웠던 시간은 체육 시간이었다. 학기 초엔 대개 ‘질서 운동’이란 걸 했다. 별 것은 아니었다. 우향우 좌향좌 자세를 배우고 줄 맞춰서 걷는 거였다. 뒤로 돌아서 걷고 절도 있게 제자리에 서고. 선생님이 지휘봉(몽둥이나 다름없었다)으로 아무나 지적하면 차례대로 번호를 불러야 했다. 당시 체육 시간 ‘질서 운동’의 핵심은 다분히 신속함과 절도였으며 그야말로 ‘군대 스타일’이었다.

군대 스타일의 부작용
그러나 쉬는 시간이면 초등학교 때 놀던 대로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나 하고 연습장에 빙고나 그리며 시시덕거리던 여중생에게 그러한 군대 스타일이 맞을 리 없었다.
엄격한 선생님의 구령과 호통에 겁먹은 아이들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줄을 잘 못 서거나 우향우 좌향좌를 헷갈려 하면 가차 없이 불호령을 내렸고 몽둥이나 다름없는 지휘봉으로 때렸다.
그렇게 긴장되고 무서웠던 시간은 처음이었다. 겁에 질린 한 아이가, 체육복을 입은 채로 실수를 했다. 체육복이 축축하게 젖은 그 아이를 놀리거나 흉본 친구들은 없었다. 보고도 못 본 척 했다. 철은 없었지만 그만큼 심약한 아이를 놀리고자 하는 악랄함은 없었던 듯싶다. 이심전심이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우리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공포 분위기 속에서 우향우 좌향좌를 배웠어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한 강제 속에서 행해진 ‘질서 운동’이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내게 남은 부작용이라면 누군가 우측 좌측을 지시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너무 큰 긴장감을 갖고 강압적으로 배운 것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더 많이 헷갈려 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필요성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난 이런 교육을 또 받게 됐다. 운전 연수를 시켜주었던 강사 분이  군대식이었다. 친절함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큰 목소리로 지시하며 장갑 낀 손등을 탁탁 내리쳤다. 교육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강사로 바꿔도 된다는 학원 규정이 있었으나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게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도 있으신데 내가 강사를 바꾸는 바람에 혹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강압적이고 군대식으로 연수를 받은 탓인지 난 운전 내내 긴장을 해야 했다. 중학교 시절 공포의 체육시간이 떠올랐다. 운전 연수는 무사히 마쳤지만 나 혼자 운전을 하게 될 때면 더 많은 긴장을 하게 됐고 자꾸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니 이러한 ‘군대 스타일’로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군대 스타일’은 요즘 유행하는 ‘강남 스타일’보다 훨씬 더 역사가 깊고 곳곳에 퍼져 있는 것 같다.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일진들의 행태, 그리고 선배나 코치의 기합, 구타로 문제시 되곤 하는 일부 스포츠계, 아이들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 등.
집단에는 나름의 특성이 있는 법이다. 거기에 존속 이유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다른 집단의 스타일을 덧입히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더러 효과가 좋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오래 가지 않을 뿐더러 후유증만 남는 법이다. 반짝 효율성을 핑계 삼아 군대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교회엔 교회 스타일이 있고 학교엔 학교 스타일이 있다. 군대 스타일이 적용되는 곳은 군대 한 곳이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집단이나 사회에서 군대식 교육 방법이나 복종을 강요해선 안 된다.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선 의문을 품고 이의를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필요한 까닭이고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단체나 집단이 존속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배지영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란씨’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오란씨’(민음사)와 장편소설 ‘링컨타운카 베이비’(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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