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부자)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부자) 괴로움을 받느니라. - 누가복음 16:19~25
누가가 기록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묵상하다가 문득 십년 전 이맘 때 있었던 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건은 부자에게 거절 받았던 나사로와 오버랩 되면서 제 마음에 사라지지 않을 하나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미안함
부산역에서 노숙인을 위한 희망 콘서트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무대는 출연진들의 리허설로 시끌시끌하고 무대 옆 한 쪽에선 공연 후에 배식할 식사준비로 분주합니다
저는 무대 뒤에서 기타를 메고 튜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등 뒤로 저를 부르는 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노숙인 한 분이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어눌한 발음으로 제게 다짜고짜 노래를 한 곡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
“저기, 기타가 좋아 보이네예. 저를 위해 지금 노랠 좀 해주이소! 뭐 그런 노래 있다아잉교.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부탁함하입시더.”
그 노래는 해바라기가 부른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제가 평소 즐겨 부르는 곡이기도 했지만, 곧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선 튜닝을 마쳐야 했습니다.
“제가 좀 있다가 무대에 올라가야 해서요…. 오늘 준비한 노래를 무대에서 들려 드릴게요.”
이 말을 건네고 저는 무대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 저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을 향한 어떤 분노랄까. 그런 느낌이 제 등 뒤로 내려 꽂혔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못내 걸려 저는 다시 그분이 앉아 계시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 사이, 그분은 보이질 않았고 벤치엔 떨어진 낙엽 한 장만이 작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그분을 찾아 봤지만 그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순간,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아뿔싸, 그분. 혹시 천사였던 걸까…’
그 때, 공연 시작을 알리는 밴드의 화려한 오프닝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진행자의 매끄러운 말솜씨는 저를 유명한 사람으로 무대 위를 오르게 했고 저는 미소 띤 얼굴로 무대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실까하고 잠깐 둘러봤지만 그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평화의 아침’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향시설이 좋은 탓에 제 목소리는 마치 광장 끝에 있는 쓰레기통 속까지도 울리게 할 듯 광장 전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평화의 아침은 오리라 평화의 아침은 오리라
모든 사람이 비로소 친구로 여겨지는 날
평화의 아침은 오리라

이 노래 말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까지 덧붙여 노래했지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얼마나 부끄러운 노래가 되어 버렸는지요. 많은 사람들 앞에 그럴듯한 노래를 불렀지만 정작,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지 못한 가수가 되어버린 셈이지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선 사랑의 목자. 그런 목자의 노래가 될 수 없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날 불렀던 노래는 신앙의 아름다운 경지를 말하는 노래였을 뿐 제 진심이 묻어난 참 노래는 아니었음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배식 하는 틈틈을 헤집고 광장을 둘러 봤지만 끝내, 그분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살면서 놓친 순간들
저는 오늘 참회의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자고,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지요. 깨어 있음. 늘 깨어 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십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 그날의 한 사건. 그분의 눈빛과 몸짓에서 배어 나온 깊은 애수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돌아보면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놓쳤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단번에 그분을 알아챌 수 있는 자가 가장 복된 자임을 압니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하지요. 성경엔 거지나사로를 위로했던 존재가 그 누구도 아닌 “개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헌데를 핥아 주었던’ 이 구절을 보통의 해석은 개들까지 나사로를 비참하게 했다, 라고 해석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개가 헌데를 핥는 것은 극진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를 위로했던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개들”이었다는 말이 되지요.
어느 시대이건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세태에선 이 말도 오히려 함량 미달인 듯하다”라고 지적한 김남조 시인의 말이 제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오늘입니다.

박보영
찬양사역자. ‘좋은날풍경’이란 노래마당을 펼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서트라도 기꺼이 여는 그의 이야기들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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