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 목사의 ‘성경 속 감사 이야기’

이번 호부터 전광 목사의 ‘성경 속 감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전 목사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 ‘평생 감사’ 등으로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슈퍼 베스트셀러’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입니다. 이번 연재에서 전 목사는 우리가 읽으면서도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던, ‘성경 속의 감사’라는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할 것입니다.<편집자 주>

성경 속에 나타난 감사를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예수님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는 이야기가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 ‘감사’가 무엇인지를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과 죽음을 불평 한마디 없이 고스란히 감당하면서 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의 생애 가운데서 우리는 크게 4가지의 감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있는 것에 감사하라
오병이어 사건은 누구나 잘 아는 사건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5천 명을 앞에 두고 “우리가 어디에서 음식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안드레가 “예수님,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며 달리 방도가 없다는 듯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비록 소량의 음식이었지만 예수님은 있는 것을 먼저 보셨고,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혹시 더 없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일에 앞서 비록 작은 분량이지만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작은 것을 놓고 감사했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 어른 5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었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감사를 잊지 말라
예수님이 가장 애쓰며 전도한 마을 사람들이 의외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고 책망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에서 실패의 쓴 맛을 보셨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수모와 멸시뿐이었습니다. 수고한 것에 비해 열매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감사로 되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어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아이들이 주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큰 비중을 두고 애쓴 일이 뜻대로 안 되어 가슴 아팠지만 부스러기 은혜로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일이 감사의 조건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모든 결과도 아버지의 뜻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라고.

슬픔의 자리에서도 감사하라
예수님의 또 다른 감사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주님은 바쁜 사역으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무덤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미 나사로의 몸에서는 냄새가 났습니다. 주님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을 의미했습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담이며, 절대로 살아올 수 없는 영원한 다리를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나아가 “돌문을 옮겨 놓으라”(요 11:39) 하시더니 뜻밖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요 11:41).
예수님은 죽음의 비극적인 상황을 뒤로 하고 먼저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너무나도 상식 밖이었습니다. 초상집에서 금기시되는 언어, ‘감사’를 주저 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고,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감사하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감사하셨습니다. 3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함이 생길 리 만무합니다. 만일 우리가 15시간 후에 죽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것도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다면 과연 감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에 만감이 교차하여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죽음을 바로 앞둔 최후의 만찬에서 이렇게 감사하셨습니다. “잔을 받고 감사하셨고… 또 떡을 가지고 감사하셨다”(눅 22:17, 19).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거행하는 숙연한 자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애의 모든 관계를 감사로 연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습니다. 꽃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은 꽃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요, 나무를 보면서 감사하는 것은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것은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는 사람만이 더 큰 감사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예수님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전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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