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릴레이 ②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한다. 누구를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부모나 형제자매,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 직장 선후배, 동료들과 만나서 지내는 과정이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1960년대 말 동아일보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자직은 도제제도와 비슷해서 철저하게 선배들의 지시와 가르침을 받으며 일을 배워가는 게 특징이다. 사건 현장에서 취재와 기사작성 요령을 직접 가르쳐주는 선배가 있는가 하면, 올곧은 기자정신과 뛰어난 문장으로 후배들의 사표가 되는 선배도 있다.
내가 존경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분은 후자에 속하는, 언론계 대선배인 홍승면 선생님이다. 내가 올챙이 기자시절 그분은 이미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었다. 흔히 기자들은 언행이 거칠고 후배들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던 시절인데도, 그분은 항상 20년이나 연령 차이가 나는 나에게도 어쩌다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며 깍듯이 존댓말을 쓰셨다.
그러던 중 1972년 말부터 언론계에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이른바 ‘유신’이라는 미명 아래 엄혹한 군사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언론사에는 정보부원이 상주하면서 모든 기사를 검열했으며, 이를 거스르는 기자는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마침내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에 항거하여 언론자유를 천명하며 정보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언론 자유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의 광고 탄압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나는 120여명의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해직되고 말았다. 당시 이사였던 홍승면 선생님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언론 탄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해임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자리를 잃고 취업마저 방해받아 번역으로 겨우 연명하던 어느 날, 홍승면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그 무렵 굴지의 어느 대기업 창업주가 갑자기 별세했는데, 그분의 생애를 다루는 전기 집필 의뢰를 맡았으니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그 많은 해직자 중 나를 선택했다는데 우선 고마움을 느꼈다. 그 후로 3년 여 동안 한 방에서 일하는 기쁨과 함께 그분의 훌륭한 인품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었다. 나는 동아일보 재직 시 잡지 ‘신동아’에 가끔씩 기다란 글을 쓰곤 했는데, 한번은 일본 ‘문예춘추’가 나의 글을 게재 요청해왔다고 홍 선생님을 통해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홍 선생님은 평소 나의 글을 눈여겨보았다고 하셨다.
그 3년 동안 나는 홍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그분은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일주일의 절반은 우리 두 사람만 오찬을 했는데 한 번도 식사 값을 내가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연히 그분의 모교인 ‘경기고 60년사’를 보고서 홍 선생님이 학창시절 일제에 항거하는 노래 가사를 작사하여 은밀히 퍼트린 혐의로 징계를 받은 사실도 발견했다.
나는 언론 파동으로 한때 낭인생활을 하느라 결혼이 늦어졌는데, 물론 나의 결혼 주례도 홍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이렇듯 3년은 쉬 흘러가고 우리는 아쉽게도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전기 작업 인연으로 그 회사의 정식사원으로 채용되었으며, 홍 선생님은 S여대 초빙교수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청천벽력과 같은 그분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연락은 있었지만 암 투병 사실을 숨기고 계셨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그분의 미소 띤 영정사진을 보자 솟구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올곧은 언론인, 해박한 교양인, 미식가, 애주가에 맛 칼럼니스트였던 홍승면 선생님. 내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신 큰 어른이시기에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김동현(재능교육 고문)

 

지난 호 이의용 교수의 감사 릴레이를 이어받은 김동현 고문(재능교육)의 글을 싣습니다. 헌데, 김 고문의 감사 릴레이를 이어받아야 할 홍승면 선생님이 작고(作故)하신 분인 관계로 다음 호 감사 릴레이는 새로운 분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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