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한국교회사 이야기 ⑮

일제의 황민화 정책은 갈수록 심해져 중일전쟁(1937년)을 전후한 즈음에는 학교는 물론이고 교회에까지 신도 의식(神道儀式)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에 굴종하거나 타협함으로써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납니다.
대다수의 교회가 국기(일장기) 게양과 황국신민서사 제창, 황거 요배와 같이 ‘천황’과 ‘국가’를 숭배하는 의식을 별 거리낌 없이 시행하였으며, 다만 신사참배만큼은 “신령들을 예배하는” 종교의식이라는 이유로 따르기를 머뭇거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못가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함이 당연”하다거나 “신사참배 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죄”라는 주장이 교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터져 나오면서, 곧 국가 의식이니 신사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갔습니다.

기독교, 배도의 길로…

이윽고 1938년 9월, 조선 기독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의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참된 정성’을 다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 뒤 장로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여 스스로 일제 국가 체제의 하부 기관으로 들어가 일제의 전쟁 정책을 지원하는 여러 활동을 벌였습니다.
돈을 모아 국방헌금을 하고 비행기를 사다 바치는 것도 모자라 “기독교도는 솔선하여 정신대가 되어야” 한다며 징병제를 선전하고 참전을 독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일찍부터 신사참배에 순응해온 감리교는 1942년에 열린 총회에서 유태(猶太) 사상을 배제한다는 명목으로 구약성경을 거부하고 내세, 심판, 재림 사상을 “미신”으로 낙인찍어 내몰았고, 성결교는 “여호와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이 실로 국민 사상을 혼미(昏迷)에 빠뜨린 죄가 있다”고 하여 유일신 신앙마저 포기하였습니다.
조선 기독교가 교단과 교회 차원에서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을 난도질 한 것입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배교(背敎)를 결행하고 배도(背道)를 조장한 셈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인이 배도의 길을 좇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 여기저기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

비록 많은 이들이 ‘넓은 길’로 갔지만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도 여럿 나왔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조선 기독교를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 평안남도의 주기철 목사,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만주의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 같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입하지 않고, 신사참배하는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않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우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리며,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않고” 나아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이들로 새로운 노회를 구성”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국가는 물론이고 그에 타협하여 교인의 신앙 양심을 짓밟는 제도 교회의 불의에도 함께 맞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특히 만주와 평안도 및 경남 지역에서 기존 교회를 벗어나 가정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속속 늘어났습니다.
평안도에서는 고흥봉‧김인희‧김지성‧김창인‧김화준‧박관준‧박신근‧방계성‧서정환‧안이숙‧채정민 등이, 경남에서는 강문서‧김두석‧박경애‧손명복‧염애나‧이현속‧조수옥‧조영학‧주남선‧최덕지‧최상림 등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감리교의 강종근‧권원호‧신석구‧이영한, 성결교의 김연‧박봉진,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기독교의 김영관‧박기양‧전치규 등도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나섰으며, 그 밖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니 불경죄니, 혹은 보안법 위반과 같은 죄목으로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면서,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가면서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암흑을 견딘 신앙

이들은 기독인이 섬겨야 할 분,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에 굳건히 터하였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 터하여,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초월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기대어 현존 질서에 과감히 맞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재림을 소망하는 신앙,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분의 재림으로 역사의 현실이 된다는 그 믿음으로 모진 탄압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겨울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지만 따뜻한 봄의 기쁨을 크게 가져다준다”며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지금의 고난을 견디자고 격려했던 김교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고 외쳤던 주기철.
천황과 국가를 절대시하는 우상숭배에 맞섰던 모든 조선의 기독인들. 이들은 모두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부활의 믿음, 그리고 재림의 소망으로 춥고 어두운 조선의 겨울, 조선 교회에 밀어닥친 암흑의 시간과 싸웠고, 이겼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이 되고 다시 내일의 기억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과 우리를 잇는 ‘한마음’입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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