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국이 맞다! 언제, 어느 채널을 틀어도 온통 드라마 천지다. 주인공들만 바뀌었을 뿐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재탕, 삼탕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제목만 따라가기도 벅찬데 하물며 내용이 엇비슷하다보면 그게 그 드라마인 것 같아 영 헷갈린다.
하긴 시나리오 작가들도 인간인데, 그리 다작을 하다보면 상상력의 한계가 있겠지. 어찌 매번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들‘만’을 쓸 수 있을까. 그래도 그렇지. 플롯이 너무 식상하다.
연적은 꼭 등장해야 하는 법이고, 사랑에는 자극적인 장애물이 반드시 설치되어야 하며, 남녀 주인공은 하나같이 서로를 향해 ‘대체불가능한 너’라고 선포하는 플롯이 수학공식처럼 자리 잡아 살짝 변주곡만 울리고 있다.

또 다른 ‘넝쿨’

이런 ‘클리셰’(진부한 표현, ‘판에 박은 듯한 문구’라는 뜻의 프랑스어-편집자주)의 장르인 드라마에서, 비록 드라마의 주된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등장하는 새로운 소재가 있다. 바로 ‘혈연’을 넘어서 커져가는 ‘큰 가족 되기’ 프로젝트이다. 드라마가 현실의 ‘대안’ 혹은 ‘꿈’을 반영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가족 되기’는 오늘날 우리의 시의적 관심주제 중 하나가 가족임을 보여준다.
일례로, 시청률 40%를 넘겨 국민드라마 반열에 들었다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은 전체 큰 줄거리 자체가 ‘가족 되기’이다. ‘전통적 가족문화’를 공유하는 대한민국에서 ‘시월드’(시댁을 지칭하는 한글과 영어의 복합합성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여성에게는, 그것도 전문직업을 가진 여성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주인공 윤희는, 그래서 아예 ‘능력 있는 고아’를 남편 삼는 재치만점 전략을 선택했다. 미국의 존스홉킨스 의대를 졸업한 재원! 일곱 살 때 미국에 입양되어 간 관계로 현재 한국엔 시댁식구가 전무한 남편!
그대로만 유지되었어도 ‘완벽남’이었을 ‘당신’(남편)은 어쩌다 그만 어려서 헤어진 한국 부모를 찾고 말았다. 덕분에 시할머님과 세 명의 시누이, 같이 사는 작은 아버님 댁 세 식구, 이모 두 분에 또 다른 작은 부모님도 ‘넝쿨째 굴러 들어’ 왔다. 굴러 들어온 것이 금이거나 더 좋은 직업 기회라면야 ‘앗싸!’ 흥분하여 탄성이라도 지를 일이지만,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열 세 명이나 되는 ‘시’댁 식구들이니 이게 웬 말이냐?
이러면서 시작된 윤희의 시집 적응기가 ‘뻔하게’ 그려지겠거니 했던 게… 이 드라마 제목을 보고난 나의 속단이었다. 초반에는 시댁 식구들이 모두 ‘부담스런 넝쿨’이었겠으나, 드라마 진도가 나가면서 점차 우여곡절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복넝쿨’로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교훈적 이야기겠거니 하고 말이다. 그런데, 윤희가 만들어가는 가족의 범위가 심상치 않다.
요즘 윤희(여주인공 이름)는 자기도 모르게 또 다른 ‘넝쿨’에 말리는 중이다. 의사인 남편이 치료하고 있다는 일곱 살 박이 자폐아 지환이다. 넘치는 모성? 그런 게 있었다면 일찌감치 자기 아기를 낳았을 윤희였다. 계획 없이 벌어진 자신의 임신 소식에 얼른 먼저 제 일부터 걱정하는 야무진 직업여성이다. 하물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지환이를 보고 불현 듯 모성애가 일어났을 리 만무하다.

함께 있으면 보인다

오히려 윤희는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천사원을 나와 무작정 상경을 한 지환이를 대신 데려다 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마지못해 파출소에 들리기는 했으나 선뜻 따라나서지 않는 지환에게 은근 협박도 한다. “너 아줌마 말 안 들으면 나 그냥 혼자 간다?” 자기를 두고 혼자 가겠다는 윤희의 말에, 도망간 엄마가 떠올랐던 걸까? 자폐증으로 내내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지환이가 윤희를 보며 ‘엄마’ 하고 달려들었다.
얘가 생사람을 잡는구나! 윤희의 처음 표정이 딱 그랬다. 웬만하면 어린아이이고 환자인데 토닥토닥 ‘그래. 엄마랑 얼른 가자!’ 임시방편으로 달콤한 거짓말쯤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 윤희는 참 야박하게도 “나 니 엄마 아니야” 그리 말하며 지환이와의 관계망을 탈탈 털어냈다. 늦은 밤이라 하는 수 없이 제 집에서 재우긴 하면서도, 곁에 있기 부담스러워 굳이 소파에 나가 따로 자겠다는 윤희에게 지환이의 존재는 몹시도 불편했다.
하지만 어쩌랴! 자고로 함께 있으면 보이는 법이다.(물론 한 이불 덮고 사는 남자라 해도 미련하거나 무심하기 그지없다면야 아무리 함께 있어도 못 보는 경우들이 있기는 하다. 가만, 그런 남편들이 꽤 많기는 한가보다. 그러니 아내들이 남편을 ‘남의 편’이라 부르지.) 미련곰탱이가 아닌 다음에야 함께 있는 사람을 어찌 읽어내지 못하랴.
더구나 오랜 직장생활에 남다른 눈썰미를 지닌 윤희는 굳이 ‘모성애’라는 이름 없이도 시누이와 조카의 살뜰한 모녀지간을 부러워하는 지환이의 표정을 읽어버렸다. 하하, 윤희는 이제 큰일 난 거다. 그게 보였으니 말이다.
비슷한 유아기를 겪어 남달리 애정이 깊은 남편에게 지환이를 입양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재차 확인해 두었지만,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당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전혀 그럴 일 없다. 부담 갖지 말라”는 확답도 들어두었지만, 아마도 조만간 윤희의 마음이 열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게 인지상정인 거다. 곰탱이 아니고 잔인무도한 인성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 맘이 그런 거다. 함께 하다 보면 상대의 마음과 몸짓을 읽어낼 수밖에 없고, 그게 지속되다보면 그의 마음과 몸짓이 내게 의미 있게 되는 거고, 그러다 떼어낼 수 없는 연대감을 느끼고 엮이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서 가족은 꼭 혈연으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제 핏줄이 끌리는 법이지’ 옛 어른들 말씀이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끌리는 것이 반드시 ‘핏줄’만은 아니다. 함께 있어야 가족이고, 함께 있다 보면 가족이 된다. 두고 보라. 윤희는 드라마 구성상 그리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곁을 지키게 된 어른으로서의 인지상정에 끌려 지환이의 엄마가 될 터이니….

진정한 가족의 의미

실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 가족이 그런 모습이었다. “누가 내 어미요 형제입니까?” 했던 예수의 말씀은 불효의 표본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서는 보다 큰 가족 공동체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다 내 가족이라는 선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던가? 이웃을 향하여 내 몸처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율법의 정수라고 예수께서 친히 요약까지 해주신 마당이다. 복잡할 것도, 헷갈릴 것도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시절의 핵심 키워드가 ‘치유’라고 한다. 상처 입은 영혼이 그리 많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리도 대량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제도를 탓할 일이고, 개선책도 논할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따뜻하게 손 잡아주는 것, 울며 달려올 때 한 번 커다랗게 안아 주는 것, 잠시 곁에 있어주길 청할 때 기꺼이 동행이 되어 주는 것, 이런 행동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사람 좋은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우리의 동행이 ‘하나님 나라의 커다란 가족’을 만들어낼 것이다.

백소영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이다.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그녀만의 따듯한 시각으로 분석한 강의와 글쓰기로 기독교세계관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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