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침략을 신호탄으로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2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 제국주의는 이른바 ‘15년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또한 달라졌습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겉으로나마 강압 정책을 누그러뜨리고 유화(宥和)의 손짓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를 향한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앞세워 황민화 정책을 시행합니다. 조선 사람을 황국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놓아야 조선이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여겼던 까닭입니다.

타협과 신앙의 갈림길에서

그리하여 일제는 “일본은 시조신(始祖神)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후예인 천황이 ‘사람으로 태어난 신(現人神)’으로서 통치하는 나라”라고 선전하면서 천황을 신으로 받들어 충성을 다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조선말과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 하겠다”는 내용의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제정하여 암기·낭송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는 ‘궁성요배’를 강제하고, 그들의 신(神)을 모셔둔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황민화 정책이 기독교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본디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만든 가치나 제도, 질서 따위를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닌 그 무엇도, 그것이 국가이건 이념이건 사람이건 결단코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현존 질서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말씀’의 잣대로 인간 삶의 짜임새 일체를 비판하고 변혁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가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맞장구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황민화의 마수(魔手)가 선교 학교를 표적 삼아 기독교로 뻗쳐오자 교회와 선교 학교의 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기독인이라면 응당 가야할 길, 그러나 그 길은 가진 것을 포기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의 탄압을 감내해야 하는 가시밭길입니다. 반면에 적당히 타협하고 웬만큼 협조하면 자리도, 재산도, 조직도 지켜내고 외려 더 부풀리고 키울 수 있는 기회의 마당입니다. 이제 그들은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본질을 포기하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은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라는 총독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어떤 종교를 신봉하던지 신사참배가 추호도 교리에 위반되거나 구애되지 않음이 확실하다”고 퍼뜨렸고, 연희전문학교 교장 원한경(H. H. Underwood)도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 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일본 정부의 외국인 손님으로서 이 정부의 호의와 보호를 받고 있는 우리들은 국법에 따라 정부와 국민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며 신사참배와 황민화의 대열에 기꺼이 동참하였습니다. 대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선교 학교들이 교회를 지키고 학교를 지키며 교육을 사수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정작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기독인이 가야할 그 길

그 와중에도 ‘좁은 길’, 믿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이들이 있습니다. 1935년 11월, 숭실학교 윤산온(G. S. McCune)과 숭의여학교 선우리(V. L. Snook)는 교장회의에서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가 참석자 전원에게 평양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자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제는 “어떤 선교사건 우리 국민교육 제도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본인 자신이 신사에 참배할 뿐 아니라 신사참배의 참다운 의미를 학생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며, 신사참배 반대는 “천황을 모독하는 것”이고 이를 거부하는 교장은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윤산온은 이에 맞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현재 행하고 있는 신사 의식들은 나에게는 분명히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기독교인들에게 그 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할 수 없음도 알려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일로 그는 교장 자리에서 쫓겨나 조선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선우리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일제가 계속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는 1938년 3월, 마침내 자진 폐교로 맞섰습니다.
뒤따라 대구의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선천의 신성학교와 보성학교, 강계의 영실학교도 문을 닫아야 했고, 광주의 숭일중학과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 등도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며 폐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기독인이라면 응당 가야할 길,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 ‘좁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인이 가야할 길은 그 ‘한 길’입니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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