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타 제널딘 라이스 선교사

라이스 선교사를 만나러 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모습에서 엄격함이 느껴지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검은색 바지정장과 흰 블라우스가 매우 잘 어울렸다. 평생 그렇게 사신 분 같이 보였다.
정확한 목소리로 요점을 잘 집어 설명해주어 인터뷰가 쉬웠다. 말씀하시거나 기억하시는 것을 보면 연세가 90세가 넘은 분으로 보이지 않는, 빈틈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분이었다. 집에는 한국에서 온 연하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직도 한국 분들과의 교류가 있는 듯 했다.

남들이 꺼리기 때문에 선택한 외과

1917년에 태어난 그녀는 한국 나이로 94세다(2011년 인터뷰 당시). 그녀의 이름은 로베르타 제널딘 라이스 (한국이름 ‘나옥자’). 미 중부에 위치한 미네소타 주에서 목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3살 때, 집 근처에 살던 한국 선교사 출신의 폴 그러브 선교사를 통해 동양과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 폴 선교사는 해주에서 사역한 선교사였다. 동양에서는 여자아이를 계집아이라 부르며 무시하고 상대적으로 남자아이보다 하찮게 여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라이스 선교사는 나중에 여자아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줘야겠다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그리고 10살이 되었을 때, 집 주변에 있는 유명한 병원을 보면서 자신이 의사가 되면 동양 사람들이 ‘딸도 의사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여자아이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그녀의 소명이 되었고 그때부터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정하고 준비를 했다.
콜로라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네소타 의대를 거쳐 일리노이에서 인턴십을 거쳤다. 외과 수술분야에서 의사를 가르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외과 의사를 지망한 것은 간단히 말해 어렵기 때문이었다. 외과 수술은 단 시간에 결정되기 때문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외과는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 지망을 꺼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외과의사로 유능하면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런 외과전문의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브란스에서 선교사로 일하려고 떠난 다음날 한국전쟁(6․25)이 터져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미국 병원으로 돌아와 많은 수술을 집도했다. 그녀는 네브라스카주 참전용사병원에서 몇 년간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곳에 있는 감리교 교회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한국으로 선교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1953년 한국에 도착해 처음에 2년간 언어를 배우면서 주말에 세브란스 병원의 외국인 병동을 도왔고 그 후에는 인천기독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후 22년 동안 세브란스 병원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수술과 교육을 담당했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수술해

Q.처음 수술을 기억하시나요?

제 처음 시술은 인천병원에서였습니다. 위장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와 엄마였는데, 척추에 결핵이 걸려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세브란스로부터 뼈를 이식받아서 척추 이식 수술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자전거를 타는 사진을 보고 기뻐했지요. 그녀가 잘 치유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처음 했던 수술 중 하나는 허리 수술이었는데 수술 도중 조명이 나가버렸습니다. 손전등을 키고 수술을 진행해 결국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56년은 상당히 원시적인 시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Q.한국에서 일하면서 큰 일을 겪으신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주님께서는 많은 도전들을 주셨지만 항상 함께 하셨고, 저 또한 주님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4·19 아침에 이화에서 수술을 하고 남대문 세브란스로 운전해 갔습니다. 경찰이 총을 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 부상당한 학생들이 세브란스로 호송되어 왔습니다. 의대생들이 데려왔었어요. 우리가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이 의대생들을 도와 부상자들을 차례대로 정렬하고 벽에다 못을 박아서 수액을 공급시킬 수 있도록 걸이를 만들었습니다. 그 날 밤새 수술을 했는데, 모두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던 것 아시죠.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했다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녀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한 아주 충성스런 선교사였다. 그녀의 충성은 은퇴 후에도 계속되었다.

Q.한국에 가기로 결정하신 것을 후회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아뇨, 항상 매우 감사했습니다. 제가 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들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매일 감사할 뿐입니다.

 그녀는 전 세계가 모두 교구이며 그 교구들이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군사로 사용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하셨다. 정말 씩씩한 분이었다. 인터뷰 마지막에는 자신이 아는 한국 찬송가를 부르셨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함께 합창을 하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헤어졌다.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