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조찬기도회나 부활절 연합예배 등 기독교계의 큰 행사에 정치인들이나 정부 기관의 장들이 참석하여 멋진 축사를 하는 경우들을 자주 경험한다. 분명 기독교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축사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의 그것보다 더 기독교적이어서 일부 청중들로부터 ‘아멘!’과 같은 감동적 반응과 함께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러한 축사를 통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까?

느부갓네살의 찬양

성경 다니엘서에도 이방의 왕 느부갓네살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고 하는 놀라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두라 평지의 금신상 앞에 모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로 그 동일한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이제 선언하기를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 3:29)고 선언하고 있다. 정말 놀랍고 감동적인 찬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왕의 이 찬양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찬양이겠는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게 참 신이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천하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섬기던 우상을 곁에 두고 다른 신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변덕을 만족시키면 어떤 신도 경배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지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놀라운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하나님 역시도 자신의 범신전에 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깊은 헌신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유익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유다 청년들의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다. 이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찬양이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다. 느부갓네살에게는 자신이 만든 금신상을 파괴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더 잘 경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아직도 금신상의 발 아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다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금신상이라는 우상은 아직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금신상은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우상이었다. 그러기에 이 금신상을 없애는 것은 어려웠던 것이다.

무너뜨려야할 삶의 금신상

우리의 찬양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목숨을 바치는 신앙의 실천을 통한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느부갓네살 왕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옛 생활과 사고방식을 십자가에 못 박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 없다고 하면 우리의 찬양도 공허하며 가증된 찬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 세워져 있는 두라 평지의 금신상을 먼저 무너뜨리고 거기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찬양임을 알아야 한다. 느부갓네살의 찬양이 인간들에게는 엄청난 감동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신을 그 앞에 두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는 가증스럽게 들려졌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런 거짓된 찬양이 없는 곳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자기 자신의 옛 생활 방식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두라 평지에 세워진 자기 영광의 금신상을 파괴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김성수
고신대 총장이며 기독교교육학 박사인 그는 인간을 존중하는 기독교 교육풍토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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