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 씨는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형을 가진 아름다운 젊은 엄마다.
얼마 전까지 대기업의 인기있는 사원이었는데 병을 앓게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수술과 방사선, 약물 치료의 반복으로 배려심 깊고 독립적인 사람이 침상에서 전적인 도움 속에 살게 되었다. 심한 통증과 물리적인 불편함으로 특유의 보드라운 미소와 인내심이 문득 덮어지기까지 하는 자리에 와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신유의 은총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하며 애쓰다 이젠 점점 천국의 소망을 말하게 된 시점, 밤낮 홀로 느끼는 외로운 고통과 갈등을 누가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은성 씨는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아이를 향한 생각을 정돈하고 있었다.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언제 가장 안타까운 상황이 올까. 사춘기 아니면 누구에게 혼날 때? 그럼 어떻게 준비해 줄 수 있을까.

모성, 다시 살아보자는 의지

그러던 중 염증으로 병원에 몇 주 간 입원했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집에 있다”며 아픈 엄마 이불로 파고 드는 세 돌 아가. 아이는 “엄마 보고 싶었어”라며 얼굴을 부비고 귀를 만지며 가슴으로 안겼다. 유치원 친구를 만나면 “우리 엄마 집에 있어. 병원 아니구 집에 말이야”라고 했단다. 잠결에 일어나면 “엄마 있어?”라고 확인하고 바로 잠드는 아기.
은성 씨는 진통제도 잘 듣지 않는 고통 속에 주님계신 천국을 그리며 기대한다고 한다. 자신의 고단함이 끝날 그 곳. 주님이 어떻게 맞아 주실지 가슴이 부풀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달려갈 길을 가는 선수처럼 하루하루의 고통을 견뎌 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아들을 바라보며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 한마디를 풀어주지 못해 외로움, 상처로 남게 하고 싶지 않은 엄마. 그 모성으로 다시 살아보자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통증으로 죽음을 바라는 것조차 아들을 위해 접어두기로 하는 것. 현재의 이 모습으로라도 존재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한편, 엄마에게 달려있는 줄과 주머니들을 쳐다보며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는 큰 애가 염려된다. 엄마한테 의지하지 못하고 벌써 몇 년을 불안하게 지내온 딸. 큰 애라고 늘 단호한 말투로 많은 것을 지시해 온 것이 갑자기 미안해지는 요즘이란다. “딸아, 더 잘할 수 있잖아….” 라며 늘 재촉해 온 엄마다. 보듬어주고 격려해주기보다 주문이 많았던 엄마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손잡아 주고 따스하게 안정감을 주어 볼까.
아픈 엄마는 아프다고 늘어질 시간이 없다. 사랑해주기, 만져주기, 딸에게 숙제부터 라는 말대신 엄마랑 좀 놀자고 말하기, 담임 선생님과 소통을 갖기. 메모 보내기 등을 계획하며 소망을 갖는다. 아이들이 커가며 달라지는 것도 보고 싶다고….
전영혜 객원기자
gracejun1024@hanmail.net

 

유머 한마디


▲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무개 집사가 저를 너무나 괴롭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처리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가 그리도 원해서 그를 보냈단다. 그리고 내가 보낼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너의 설교를 열심히 듣더니 그렇게 됐구나.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걸고 가장 현명한 답을 공모했다.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인가?’
이 엉뚱한 공모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응모했다. 열기구를 타고 가면 된다는 의견, 지도상에서 지름길을 측정하여 그 길로 간다는 의견 등 각기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하지만 영예의 1위를 차지한 답벼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1위를 차지한 답변은 바로 이것이었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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