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렐라 존스트 맥스웰 선교사

로베르타 라이스(한국명 ‘나옥자’) 선교사님이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다. 내쉬빌은 블랙마운틴에서 차로 30분이 채 안 되는 거리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빈번하게 내쉬빌이 나온다. 내쉬빌은 아마도 남부지역 신학생들의 메카였던 것 같다.
여기는 감리교에서 은퇴하신 여자 선교사님들만 있어서인지 입구부터 아기자기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초대한 라이스 선교사님과 다른 두 분의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 분은 만화에 나오는 ‘호호 할머니’가 생각나는 분이셨는데, 허리와 걸음이 불편하셔서 앞에 밀고 다니는 기구를 사용하시면서 이동하셨다.
또 다른 한 분은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를 하셨던 분으로 우리는 식사 후에 그 분의 집으로 갔다. 방이 두 개있는 집으로, 한국가구로 꽉 찬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3단장이며 한국 소품들이 곳곳에 있었다.

한국에서 보낸 5년이 가장 인상에 남아

자신은 별로 할 말이 없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하셔서 깊은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아쉬웠다. 거실에는 큰 퍼즐이 있었다. 아마 치매 예방을 위해 매일 하시는 것 같이 보였다. 이 분은 자신이 일한 곳과 시간 등 대부분 기억을 못하셨고 당시의 상황도 기억을 잘 못하셨다. 그 분은 그냥 우리가 한국에 왔다고 하니 반가워서 만나러 오신 것이었다. 인터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아서 우리는 사진들을 보며 질문을 했다.
렐라 존스트 맥스웰 선교사님은 일리노이에서 태어나서 10살 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는 막연하게 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치료사가 더 맞을 것 같아서 물리치료사를 시작했다. 후에 이 사역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을 느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 한국에서 오신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가서 도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좀 더 기다리라고 했고 그 시간동안 그녀는 아이들에게 물리치료를 하며 돌보는 일을 4년간 하게 되었다. 결국 1961년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언어를 배우며 아이들에게 물리치료를 한 그녀는, 세브란스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보낸 첫 5년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한 한국

온화한 성품인 그녀에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잘 맞았을 것 같았다. 그때 본인은 차가 있어 다른 한국간호사들과 함께 한국의 이곳 저곳 여행다닌 것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녀는 5년간 한국에 있다 1년간 미국에 가서 선교사역 보고를 하고 다시 한국에 와서 각 가정을 돌면서 물리치료를 했다. 당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차가 없어 병원까지 오는 것이 힘들었기에 방문치료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물리 치료를 더 공부하러 미국에 갔으나 선교회에서는 베트남에 가라고 해서 2년 3개월간 베트남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미국으로 귀국한 뒤 머물렀다.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뇌졸중을 앓으시면서 외동딸인 자신이  어머니 곁을 지켜야 했다. 결국 한국은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사역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결혼을 했으나 지금은 남편도 세상을 떠나서 이곳에 홀로 머물고 있다.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사람들과 친밀히 지내고 한국인들에게 사랑받으며 그들을 섬겼던 흔적이 가지고 있는 사진과 선교 자료 곳곳에 묻어났다. 그녀의 삶에 한국은 친절한 나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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