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서 중에 ‘흑안’(黑顔)을 높게 평가하는 책이 있습니다. 흑안은 글자 그대로 검은 얼굴입니다. 그러나 얼굴 피부색이 검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얼굴을 보면, 특히 얼굴 가운데 눈을 보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흑안은 검고 흐려서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말합니다. 이른바 마음을 감춘 얼굴이지요. 흑안을 좋게 여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속생각을 숨긴 음흉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세의 처세술

그런데 ‘흑안’이란 말이 생긴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런 대로 봐줄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권력과 사람이 쉬 출현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그 불안정한 시대에 뜻을 품은 사람들은 그 뜻을 펴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은 흑안이 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음모와 술수,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신의 속뜻을 청명하게 다 드러내고서는 결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지를 보아도 자신의 속뜻을 숨긴 채 상대를 설득하여 결탁하거나, 또는 위협하고 농락하는 숱한 지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읽히는 순간, 모든 계획과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흑안, 곧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처세술이라는 측면에서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본래 자신의 뜻을 정갈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복선을 깔지 않고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는 편입니다. 이른바 청안(淸顔)주의자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흑안’이라는 말에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솟아오른 거부반응을 가라앉히고, 곰곰 그 말을 생각하면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흑안이 결코 처세술의 차원이 아니라는 반성이 생긴 것입니다. 제 머릿속에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너는 정말로, 언제나, 누구에게나 맑고 분명하게 마음을 드러냈던가?’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믿을 수 없는 사람, 제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사람, 쉽게 저를 곤궁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경우 제 속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를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용감하게 ‘당신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어느새 흑안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면서도 저는 청안을 내세웠습니다.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맑음’의 모순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 속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냈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제 속에는 이러저러한 다른 생각의 조각들이 꼬물거리고 있습니다. 제가 드러낸 생각이 제 생각의 전부가 아닌 것이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생각이 있음을 숨긴 것입니다. 맑다고 생각한 것이 맑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제 생각이랍시고 덜렁 말한 것이 남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섣부른 조언이 되고 말기도 합니다. 말을 멈추고 좀 더 생각하고, 자신의 속생각 가운데서 올바른 것을 잘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말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생각을 있는 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남에게 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 판단과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기 전에 좀 더 살피고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고, 결국 그것은 흑안에 가까운 얼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 생각을 제가 다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제 무의식은 제 의식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제 얼굴에 드러낸 생각이 제 진정한 생각이라고 여기고, 마찬가지로 남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남의 생각을 다 안다고 믿습니다. 돌이켜보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제 생각도 다 알지 못하면서 남의 생각을 다 안다고 확신하다니 말입니다.

자신만의 진실을 가진 존재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문제의 상당수는 내가 상대의 생각을 다 안다고 하는 데서 생깁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말, 얼굴 표정, 행동거지를 보면서 상대를 다 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가 아는 바와 전혀 다른 일을 합니다. 그래서 배신을 당했다고 분노합니다.
이런 실수 중에 가장 흔한 실수는 자녀에 대해서입니다. 부모들은 다 자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부모는 자녀를 다 알지 못합니다. 매일 보는 자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과 생각, 그것이 결코 자녀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자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상대가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꾸로 보면, 자식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 내 얼굴을 놓고 ‘흑안’을 생각한다면 남의 얼굴을 놓고도 ‘흑안’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는 내가 다 파악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자신만의 진실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럴 때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른 행동을 해도 그 행동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이든 상대방이든 그 심중을 꿰뚫어보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다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흑안, 두고두고 생각해볼 화두인 것 같습니다.

서진한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인이자 대한기독교서회 상무이다. 아름다운동행을 통해 삶과 신앙에 관한 부드럽지만 예리하고, 예리하지만 깊은 연민과 애정이 묻어나는 글들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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