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는 내 핑계를 외려 기뻐하신다. “바쁜 게 좋은 것”이라면서 말이다. 일터가 없고 일감이 없다고 난리인데, 일할 수 있고 게다가 바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되물으시며, 당신을 찾지 못하는 ‘불효’를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바쁜 것이 효도”라며 도리어 반기기조차 하신다. 마음까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말씀만큼은 그러하다. ‘일 없는 것이 곧 죄(罪)’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여느 부모인들 다를까.
오늘 우리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성장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최선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생산성이니 성장이니 효율이니 하는 말들이 우리 삶을 온통 사로잡고 있다. 그것이 곧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판국에 ‘쉼’을 이야기하자니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테다.
일이 없어서 난리이고 일하지 못해 안달머리가 난 세상, 쉬는 것이 곧 낙오를 뜻하는 현실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껏 ‘쉼’을 얘기하더라도, 대개는 내일 더 많이 일하기 위해 오늘 힘을 비축하자는 뜻의 ‘재충전’ 쯤으로 받아들인다. 사정이 이럴진대 그냥 푹 쉬라고 부추긴다면,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망언’이라며 여기저기서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성경이 끊임없이 말하는 ‘쉼’

그런데 바로 그 ‘망언’을 주저 없이 일삼는 데가 있으니, 곧 성경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쉼’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를 즐기시며 이렛날에 쉬셨으니 사람들도 그분의 창조를 기념하며 이날만큼은 편히 쉬어야 한다고, 파라오 밑에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혹사당하던 그때를 기억하며 적어도 하루쯤은 푹 쉬라고 타이른다.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힘겨운 노동과 억눌림에서 벗어나 모두 ‘사람답게’ 살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쉼’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가 ‘망언’으로 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달력에 빨간 날도 늘었고, 연휴라도 될라치면 길마다 골마다 쉬러 가는 인파로 들썩이는데 말이다.
예나 이제나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쉼’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생명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 시대야말로 정작 쉴 수도,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사람다움도 생기도 잃어버린 그런 시대, 그런 사회여서가 아닐까.
사회의 온갖 짜임새가 ‘쉼’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쉴 여유도 쉴 능력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어쩌면 ‘쉼’이 무엇인지조차 아예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살펴야 할 성싶다. 참말로 ‘쉬는 것이 죄’가 되도록 내버려둘 요량이 아니라면 말이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넋 놓고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닐 테다. 그렇다고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한 충전의 시간도 아니다. ‘쉼’은 차라리 체제가 요구하는 삶의 틀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쳇바퀴 돌듯 살아온 그 삶을 돌아보고 그 허상을 깨치는 것을 이른다. 그것은 여태껏 해오던 그 일을 그치고 이제껏 살아온 그 방식을 멈추는 것, 그러고는 자기를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되찾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보고 겪은 삶이 전부가 아니며, 그 너머에 또 다른 세계, 참된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쉼 없이 생산성을 높여야 하고 늘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는 파라오의 신화를 거부하고, ‘아직 모자라다’며 미친 듯이 질주하도록 독려하는 맘몬의 채찍질을 뿌리치며 기존하는 가치와 질서를 뒤집는 적극적인 결단이고 행동이다.

무작정 달리는 최선은 ‘독’

물론 살다보면 불현듯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하고, 이러다 자칫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속을 태울 때도 있다. 삶이라는 것이 그 무엇 하나 근심거리 아닌 것이 없고 그 어느 하나 시원스런 해답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다보니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좀 더 많이 가지면 나을까 싶은 생각에 끊임없이 무엇이 ‘되려’ 하고 무엇을 ‘하려’ 한다. 쉴 짬을 낼 수조차 없다. 어느새 일의 노예, 생산성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제 너나없이 일에 허덕이며 세상이 정해놓은 규준에 따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승자 독식의 경쟁 논리가 삶의 모든 부문을 잠식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마당에, 이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평화니 평안이니 안식이니 하는 말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외려 자연스럽다. 오죽하면 팔순 노인조차 “바쁜 게 좋은 것”이랄까. 바삐 서둘고 빨리 움직여 목표에 일찍 다다르는 것, 그것만을 최선으로 여기는 사회, 바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목표치의 눈금 채울 요량하기 바쁘고 경쟁에서 이길 궁리하기 급급한 이들에게 ‘쉼’은 곧 불안일 수밖에 없을 테다. 지위니 성취니 하며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 자기를 꿰맞추느라 정신없었던 삶을 돌아보기는커녕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서인 양 어루꾀는 체제의 틀에 갇혀 더 이상 편안한 ‘쉼’조차 누릴 수 없다. 쉰다더라도, 체제가 정해놓은 규격을 좇아 일 치르듯 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전투다. 그렇게 저마다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여 애오라지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생기도, 핏기도 없이 피곤에 지친 나날을 보낼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 해서 모두 칭송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한 채, 달리는 것 그 자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무작정 그곳만을 향해 달리는 최선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목표를 향한 불굴의 의지와 죽음을 무릅쓰는 투지를 찬사하는 세속의 범례를 아무 의심 없이 좇다보면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일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말로 더 이상 뛰지 않고, 더 이상 다른 어느 곳에 이르려고 애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쉼’을 누릴 때이다.


멈춰서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라

‘쉼’은 생산성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고, 목표 지점에 고착된 우리 시선을 돌이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참된 ‘쉼’은 일의 강박과 성취의 압박에서 벗어나 그냥 자기의 ‘있음’을 즐기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를 관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달리기 위해 온 정성과 힘을 쏟는 것도, 더 잘 달리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도 아니다.
달리기를 멈추고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느끼기 위해 마음을 깨우는 일, 곧 ‘쉼’이다. 생산성과 성장만을 강요하는 야만스런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싸움을 중단하고, 일을 멈추고, 목표 설정을 멈추고, 손익의 계산까지도 몽땅 멈추고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찾을 때 참된 ‘쉼’이, 평화가 찾아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만” 쉴 수 있는 까닭이다.
올 여름에는 이것 없이는 못 살지 싶은 것들을 내팽개치고, 일손도 내려놓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살아내고자 하는 쉼 없는 움직임을 멈추고, “나에게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든든함에 깊이 머물러 보면 어떨까?
이제까지 내 삶을 버텨왔던 의지, 지략, 계획을 모두 내려놓고, ‘되려는’ 마음도 ‘하려는’ 욕심도 벗어놓고, 그냥 고요히 침묵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컴퓨터도 두고, 휴대전화도 끄고, 세상을 향한 촉수를 떼어내고 외딴 곳으로 들어가 새소리며 바람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체제에서 소외된 고난의 현장, 그곳에서 때로는 폭풍같이 때로는 햇살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 질서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대정신도 거스르며,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냥 한번 푹 쉬어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오롯이 그분께 맡기고, 하나님을 믿고서 말이다.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지고 근육을 조이던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생기가 감돌 테다. 내 생명의 근원, 내 가치의 원천에 뚜렷이 닿으면서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을 힘이 솟아나고 이내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올 테다.
마침내 체제가 요구하는 삶의 틀에서 벗어나 그 너머의 참된 세계를 찾아나서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이렇듯 참된 ‘쉼’은 우리 삶을 추세우고 생명의 숨결을 되찾아주는 창조주의 선물이다.

박규환
숭실대 대학원의 기독교학과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리스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예람교회 공동목회자로 사역하는 박 목사는, 경상북도 맑은 곳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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