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대 선교사 이야기 ⑪ 케네스 스콧 선교사

▲ 스콧은 북장로회 출신의 의료 선교사다. 1916년생인 그는 올해 96세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다.

케네스 스콧 선교사님을 만나러 은퇴촌으로 갔다. 그의 아파트 문 앞에는 한국 도자기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어 그가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선교사인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태어나 지내다 11살 때 중국에서 추방당했다. 그 때 한국에 오게 되어 평양 외국어대학교에서 4년간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나병환자의 믿음에 도전받아

1916년생인 스콧 선교사님이 올 해 96세란 말에 깜짝 놀랐다. 귀가 좀 안 들려서 보청기를 끼고 계신 것과 걷는 것이 좀 불편한 것 말고는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어서 인터뷰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스콧 선교사님은 의과대 인턴 때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 병원에서 간호 과장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1941년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태평양 전쟁 때문에 군의관으로 입대 2년 반 동안 부인을 만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에 가서 선교를 시작했지만 공산화가 되면서 곧 쫓겨나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 선교지는 대구 동산병원이었다. 동산병원은 그 당시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전쟁 중이라 군인들과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동산병원에 있으면서 수술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약품과 의료기기, 소모품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아껴 쓰고 대체해서 사용하면서 병원을 이끄셨다. 부족한 시간과 열악한 환경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선교사님은 대구에 있는 ‘애낙원’이란 나병환자촌에 가서 도왔다. 한번은 나병환자가 찾아 왔는데 나병으로 인해 눈이 멀었지만 그는 신약 전체를 다 암송하고 있었다. 성경을 암송하면서 웃는 모습이 그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구에 계시다 1956년 연세대학병원으로 오라는 선교회의 요청을 받아서 그 후 연세대학병원에서 일하게 되셨다.

수술로 살려낸 환자의 결혼 주례

서울에서 일하실 때 결핵환자들이 많아서 수술을 굉장히 많이 했다. 아마 그 때 한 수술 기록은 세계 기록에 남을 정도라고. 한국에 계시면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수술이 있다고 하셨다. 입술과 가슴이 붙어서 온 환자, 수산화 나트륨을 먹고 자살 기도를 했던 한 청년. 결핵으로 학교도 그만두고 삶을 포기했던 한 자매는 수술 후 회복하여 약혼자가 찾아와 그들의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 때 생애 처음 주례를 했다.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좋았던 것은 좋은 교수들과의 만남이었다. 홍필훈 박사는 같은 기독교인이라 수술을 같이 하며 많은 교제를 했고 그 외에 문 박사님과 민 박사님 그리고 고병훈 박사님과 함께 일하신게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으로, 함께 교제하며 일하며 한국에서 어려운 시기를 서로 도우며 헤쳐 갔다.
스콧 선교사님께 한국 사람들에게 감동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한국 사람은 일본으로부터, 공산주의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자신이 볼 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고 있다고 하셨다. 가장 감사한 것은 지금 한국이 선교 강국이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스콧 선교사님은 1963년 한국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다시 인도로 떠나게 된다. 그렇게 간 인도에서 그는 의료 선교사로, 리더로 북인도지역을 하나로 만들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11년간 사역하셨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을 따라 살아 왔다고 했다. 무엇을 결정할 필요 없이 그 분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셨다. 하나님은 늘 은혜로우셨고, 늘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신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스콧 선교사님은 북인도에서 11년 사역 하시고 은퇴 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사람들의 건강을 챙기고 돕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 이은 선교사의 삶이 존경과 함께 감동으로 다가왔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한병선
‘한병선영상만들기’ 대표로 한국의 3세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사역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아름다운동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