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버들,겨루에도 호랑이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 새봄에 부활

식물원을 5킬로미터쯤 앞두고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커피도 한잔 마시고 싶었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습니다. 국도 옆에서 흔히 보는 여느 휴게소처럼 실내는 우중충했습니다. 손님은 아예 없었습니다. 어묵꼬치 따위가 담겨 있는 솥 앞에는 사장과 매니저와 청소부를 겸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아주머니와 딸처럼 보이는 여학생뿐이었습니다. 어른이 몹시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을까요? 여학생의 존재가 한없이 푸르고 싱싱해보였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더니 아하, 그 애를 닮았군요.
잘 아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지난여름, 조그만 선교단체에서 대접하는 공짜 밥을 먹으러 갔다가 만난 아이였습니다. 일면식도 없이 이름만 알고 있던 어느 선교사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무얼 물으면 조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조리 있게 대답했습니다. 칭찬을 하면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습니다. 커서 무얼 하고 싶으냐고 했더니 국제기구에서 일할 작정이라고 했습니다. 곁에 있던 이가 영어와 독일어는 물론이고 아랍어도 능통하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졸업과 동시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재원이라는 겁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복도 많구나, 너는. 어여쁜 얼굴에, 고운 성품에, 총명한 머리에.’ 생뚱맞게 아이의 부모가 보고 싶었습니다.

#예쁘고 똑똑한 그 아이의 죽음

그렇게 헤어지고 대여섯 달 뒤에 부음을 들었습니다. 유학길을 떠나기 전에 가족들끼리 나들이에 나섰다가 계곡에서 실족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엔 하루아침에 스러져버린 고운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어서 말할 수 없이 아파할 아이의 부모가 떠올랐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도 이렇게 아깝고 원통한데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나라로 갔으니 이제 행복할 거라든지, 조만간 만날 거라든지 하는 얘기로는 어떻게 그 당장의 상실감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우울한 기억 탓인지, 식물원 전체가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광장의 계수나무는 잎을 다 떨어뜨린 채 맨몸이 됐습니다. 메타세콰이어 광장에도 죽은 잎이 한바닥입니다. 씨앗을 모두 날려 보낸 부들의 암꽃은 내장을 드러낸 채 막막히 서 있습니다. 네가래는 초록색을 잃었습니다. 이맘때는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서 식물원 전체가 적막강산입니다. 죽음의 계절,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았을까?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서글픈 눈으로 랄리구라스를 훑어보고 돌아서는데, 무언가가 반짝 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빨간 눈이 점점이 달려 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보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켜 놓은 것처럼 화려합니다. 늘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식물원의 정은 씨가 호랑버들, 정확히는 호랑버들의 겨울눈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대단히 부지런한 성격이어서 남들보다 앞서 잎을 떨쳐버리고 이렇게 겨울눈을 준비해뒀다가 해동이 되기가 무섭게 꽃을 피워 올린다는 겁니다. 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모양이며 타는 듯 붉은 색깔까지 이름 그대로 호랑이 눈을 닮았습니다.
한 가지 잘라다가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땅에서도 한겨울의 심정으로 살고 있을 내외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겨울이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준비의 계절임을 설명해줄 특사로는 이만한 친구가 또 없을 겁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라도 호랑이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 있다가 내년 봄에 화려하게 부활하시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해줄 테니 말입니다. 온몸에 지녔다는 그 아스피린 성분이 마음의 통증에도 잘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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